[김형준의 정치비평] 승복 없이 민주주의 없다

입력 : ㅣ 수정 : 2017-03-03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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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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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대한민국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찬성(촛불)과 탄핵 반대(태극기)로 나뉘어 두 동강 나고 있다. 나라가 이렇게 갈린 데는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찬탄(贊彈)과 반탄(反彈) 측 모두 진영의 논리에 빠져 헌재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찬탄 측에서는 “탄핵이 기각되면 혁명밖에 없다”는 선동적인 발언을 공공연하게 했다. 반탄 측에서는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무조건 승복하는 것은 헌재에 복종하는 노예가 되라는 것”이라는 위험한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이런 불복종 발언들은 우리가 그동안 소중히 가꿔 온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다. 분노만으론 세상을 바꿀 수 없고, 허황된 선동으론 국민을 설득할 수 없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탄압하면서 법을 오직 통치의 수단으로서만 이용했던 과거 권위주의 시절 불복은 정당화될 수 있었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정의롭지 못한 법’에 대해 저항하고 불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결함 없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헌법에 규정된 제도와 절차에 따라 사법부가 내린 판결에 불복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도 정의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이다. 법 상식과 국민의 법 감정으로 보면 대통령은 탄핵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헌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누구도 섣불리 예단하기 어렵다. 그런데 헌재 결정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분열의 시작이 돼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분히 결과를 기다리고 인용이든 기각이든 무조건 승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승복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박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 박 대통령은 2004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노무현 대통령에게 탄핵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심지어 “헌재 결정을 수호할 의무가 있는 것이 대통령이다”라고 말했다. 2007년 8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주류인 박근혜 후보는 1.5% 포인트 차이로 비주류인 이명박 후보에게 석패했다. 박 후보는 ‘이명박이 본선에서 필패할 부패하고 불안정한 후보’라고 비방했지만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승복했다. 박근혜의 ‘아름다운 승복’은 경선 불복과 탈당이 전통처럼 굳어진 대한민국 정당사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언론은 이명박의 승리보다 박근혜의 경선 승복을 더 크게 다루고 더 높이 평가했다. 당시 언론은 박근혜의 승복은 민주주의 원칙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호평했다.

그 이후 박근혜는 원칙과 신뢰의 아이콘이 됐고, 이런 정치적 자산은 훗날 대통령이 되는 데 밑거름이 됐다. 박 대통령은 최근 박사모가 보낸 이른바 ‘백만 통의 러브 레터’에 감사 답신을 보냈다. 탄핵 선고를 앞두고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한 여론전에 나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박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감사 답신보다는 헌재에서 어떤 결과가 나와도 승복하자는 대국민 호소다. 1972년 6월 현직 미국 대통령 닉슨의 재선을 획책하는 비밀 공작반이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해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다 체포된 사건이 발생했다. 애초 닉슨은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과 백악관의 관계를 부인했으나 1974년 8월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대통령 탄핵 결의가 가결되고 상원에서 탄핵당할 위기에 몰리자 결국 사임했다. 그는 사임 연설문에서 “국가의 이익은 어떤 개인적인 고려보다 우선해야 한다”면서 “이 나라가 요구하는 이익에 부합되도록 대통령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고 했다.

비록 닉슨은 불명예스럽게 사임했지만 명연설을 통해 미국을 하나로 모았다. 박 대통령에게도 이런 결자해지의 용기가 필요하다. ‘억울하다’, ‘특검에 낚였다’는 푸념과 반박은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 이제 박 대통령은 헌재 결정 이후 발생할지도 모를 우려스러운 사태를 막고 국익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 ‘아름다운 승복’을 호소하는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할 수도 있고, 헌재의 최종 선고 전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수도 있다. 무엇이 지금은 죽지만 영원히 사는 길인지, 무엇이 자신이 결혼한 대한민국을 진정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인지 깊이 성찰할 때다.
2017-03-04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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