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정 컬처 살롱] 봄날, 강변을 거닐며

입력 : ㅣ 수정 : 2017-03-01 00:07

폰트 확대 폰트 축소 프린트하기
겨울은 매년 떠날 때마다 가지 않겠다고 앙탈을 부린다. 꽃을 샘내는 겨울, 그러나 입춘, 우수는 이미 지났고, 며칠 뒤면 경칩이다. 나무엔 물이 오르고, 아지랑이는 피어나고, 개구리도 곧 깨어날 것이다. 바야흐로 봄.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
클릭하시면 원본 보기가 가능합니다.

▲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

지난 주말 봄을 맞으러 친구들과 강변으로 나갔다. 다운 점퍼가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햇살은 따스했다. 합정역 근처에서 만난 우리는 봄 소풍 가는 아이들처럼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며 양화대교로 향했다. 질주하는 차들을 기다렸다 길을 건너니 뜬금없는 동상 하나가 서 있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로 시작되는 ‘단심가’의 지은이 정몽주 동상이었다. 1970년 10월에 건립된 이 동상은 한때 서울의 명물이기도 했고, 동네 꼬마들에겐 신나는 놀이터이기도 했다. 비슷한 때 강 건너 양화대교 남단에 세워졌던 을지문덕 장군 동상은 이미 오래전 다른 곳으로 떠나갔지만, 오십년 가까운 시간 동안 처음 그 자리를 지켜 온 정몽주 동상은 역시 일편단심의 상징이었다.

우리는 양화대교로 들어서 한강 둔치로 내려갔다. 강의 흐름을 따라 구불구불 휘어진 길은 봄볕에 녹고 있었다. 계단 몇 개 내려온 것뿐인데 자연의 기운은 확연히 달랐다. 그 길을 걷다 올려다본 하늘 끝에 한옥 정자 지붕이 살짝 걸쳐 있었다. 망원정(望遠亭)이었다.

망원정은 태종 이방원의 작은 아들인 효령대군의 정자다. 본래 이름은 희우정(喜雨亭). 세종의 형인 그는 아우에게 왕권을 양보하고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 가뭄이 심했던 어느 해 세종이 형을 찾아왔을 때 비가 내렸고 오랜 가뭄이 해소됐다고 한다.

이에 세종이 희우정이란 이름을 내렸고, 이후 이 정자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이어받았다. 왕이 되지 못한 왕의 형 효령대군과 월산대군. 그들은 이 정자에 올라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권력 무상, 삶의 회의를 느꼈을까. 아니면 욕망의 짐을 내려놓고 자연인으로서 충만한 행복을 느꼈을까.

망원정에 올라 한강을 바라보면 선유도가 보인다. 지금은 섬이 된, 섬이 아니었던 섬. 선유봉이라 불리던 그곳은 신선이 노닐 만큼 빼어난 경치를 갖고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엔 여의도 비행장을 만들기 위해, 해방 후 미군정기엔 인천으로 가는 도로를 만들기 위해 채석장이 돼야 했다. 1962년 제2한강교인 양화대교가 착공되면서 선유봉은 육지와 떨어진 섬이 됐다. 그곳에 태종 이방원의 큰아들인 양녕대군의 정자 영복정(榮福亭)이 있었다.

형제의 심장에 칼을 꽂아야 했던 왕자의 난을 알고 있던 그는 어쩌면 스스로 폐세자의 길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조선 최초의 적장자 세자였음에도 비운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던 양녕대군은 세상 울타리를 벗어나 명산대첩을 떠돌며 생을 마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왕의 자리를 뺏긴 한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조카인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할 때 기꺼이 세조의 배후가 됐고, 그 대가로 이곳에 정자를 짓고 말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친족들의 죽음으로 얻은 부귀영화는 달콤했을까.

이방원의 아들인 양녕과 효령대군, 그리고 정몽주. 그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던 봄 산책은 상쾌했지만 미적거리고 물러나지 않는 겨울은 불쾌했다. 마치 요즘 세상을 닮은 것 같아서.
2017-03-01 26면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밴드 블로그

/

    건강나누리캠프

서울Eye - 포토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