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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 ‘국민 모독’/안동환 문화부 차장

[데스크 시각] ‘국민 모독’/안동환 문화부 차장

안동환 기자
안동환 기자
입력 2016-11-17 18:18
업데이트 2016-11-17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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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환 국제부 차장
안동환 국제부 차장
연극 ‘관객 모독’은 독일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대표작이다. 우리나라에는 1978년 배우 기주봉의 형 기국서 연출가의 극단76이 초연했다. 도발적인 사회 비판적 대사들은 유신시대를 살던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겼다.

관객 모독은 연극적 관습을 전복시키는 실험극이다. 배우들은 끊임없이 “이것은 연극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관객들의 고정관념을 무참히 깬다. 대사는 많지만 난해하다. 배우들은 옹알이를 하듯 발음하거나 말을 분절하고 해체한다. 공연 내내 관객들은 배우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욕설을 들으며, 세숫대야에 담긴 물을 퍼맞는다.

30여년간 꾸준히 이어져 온 관객 모독은 관객들로부터 신선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연극은 무대에서 빛난다. 무대 밖으로 나오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온 나라를 충격에 빠트리고 있는 최순실 연출, 박근혜 대통령 주연인 ‘국정 농단 사태’는 극적 요소가 짙은 연극 같다. 문고리 3인방, 청와대 수석들과 대기업 총수 등 캐스팅도 화려하다. 우리 상식과 질서를 전복하는 이 거대한 부조리극의 제목은 ‘국민 모독’이다.

박 대통령 스스로 공공재인 국가 권력을 사유화하며 헌정 위기를 자초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언니 옆에서 의리를 지키니까 이만큼 받잖아”라는 대사를 날린 최씨에게 문화예술은 돈벌이 수단이 됐다.

박 대통령은 알까. 역대 정부 중 처음으로 문화융성을 국정 기조로 내세운 그에게 걸었던 문화예술계의 순수했던 희망과 기대를.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건 부패 세력의 놀이터가 된 문화예술의 오점과 폭력의 상처들뿐이다.

문화예술인에 대한 국가 폭력은 밥줄을 끊겠다는 협박으로 왔고, 누군가에게는 대상포진으로 왔다. 장사익의 ‘찔레꽃’을 즐겨 부르던 연극배우는 지난해 한 평 반(4.6㎡) 고시원 방에서 굶주리다 죽었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길들이기’는 조직적이고 폭력적이었다. 공공성을 앞세워 은밀히 작동한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폭력은 블랙리스트라는 시대 착오적 ‘배제’와 ‘검열’ 그리고 ‘특혜’의 모습으로 구체화됐다.

힘도 없고 자본도 없는 연극판은 본보기 케이스였다. 비정상적인 권력은 단속에 열중한다. 박정희·박근혜·세월호·좌파는 정권이 싫어하는 작품들을 찍어 내는 공통 키워드였다. 예술적 자존심에 모욕감을 주고 돈(정부 지원금)으로 회유하다 말을 듣지 않으면 무대를 떠나게 만들었다. 한 중견 연출가는 “조용히 연극만 할 테니 나를 내버려 달라”고 사정했다. 정권이 불편해하는 영화에 출연한 주연 배우는 차기작 섭외가 끊겼고, 세무조사에 시달리던 배급사 대표는 대상포진을 앓았다.

문화예술은 종종 현실을 압도하는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사회를 성찰하게 한다. 2014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광주정신’의 ‘세월오월’(홍성담), “넌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영화 ‘달콤한 인생’), “정의?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 있긴 한가?”(영화 ‘내부자들’), “우리는 벌을 받기 위해 사는 게 아니란 말이오!”(드라마 ‘송곳’)

잘 뭉치지 않던 288개 문화예술 단체와 7449명의 예술가가 역대 최대 규모의 시국선언을 했다. 무대와 작업실에 있어야 할 그들이 시민들과 함께 창작의 자유와 민주주의 후퇴를 거리에서 외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의 민주주의는 방부제가 쳐져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이라고 과신했던 건 아닐까. 이 거대한 부조리극이 막을 내리면 한국판 ‘앙시앵 레짐’(구체제)과 그 무리들은 무대 밖으로 퇴장할 것이다. ‘커튼콜’은 없다.

ipsofacto@seoul.co.kr
2016-11-1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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