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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와 함께 읽는 세계의 명시] 종달새에게

[최영미와 함께 읽는 세계의 명시] 종달새에게

입력 2016-11-09 22:40
업데이트 2016-11-10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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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새에게(To a Skylark)

-퍼시 비시 셸리

…(초략)…

우리는 앞을 보고 또 뒤를 보며,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갈망한다:

우리의 가장 진지한 웃음에는

약간의 고통이 배어있고

우리의 가장 달콤한 노래는 가장 슬픈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

비록 우리가 증오와 오만과

두려움을 비웃을 수 있을지라도;

우리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물건으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대의 즐거움에 어찌 근접할지 나는 알지 못하네.

기쁜 소리를 내는

어떤 악기보다도 뛰어나고,

책에서 얻는

어떤 보배보다도 좋네,

…(중략)…

그대의 머리가 아는

기쁨의 절반이라도 내게 가르쳐다오;

그러면 내 입에서 흘러나올

조화로운 신기(神氣)에

세계가 귀를 기울이리, 지금 내가 그대에게 귀 기울이듯이.

We look before and after,

And pine for what is not:

Our sincerest laughter

With some pain is fraught;

Our sweetest songs are those that tell of saddest thought.

Yet if we could scorn

Hate and pride and fear,

If we were things born

Not to shed a tear,

I know not how thy joy we ever should come near.

Better than all measures

Of delightful sound,

Better than all treasures

That in books are found,

Thy skill to poet were, thou scorner of the ground!

Teach me half the gladness

That thy brain must know;

Such harmonious madness

From my lips would flow,

The world should listen then, as I am listening no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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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
최영미 시인
우리는 앞을 보고 뒤를 보고 또 옆을 보지만, 우리가 찾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도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노력을 그만두면 안 되리.

‘종달새에게’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1792~1822)가 이탈리아에 머물던 1820년에 완성한 105행의 서정시다. 그의 두 번째 부인 메리와 시골길을 산책하다 영감을 얻어 쓴 시라는데, 그 특별했던 날을 메리는 이렇게 기술했다.

“아름다운 여름 저녁이었다. 오솔길을 거닐다 즐겁게 지저귀는 종달새의 합창을 들었다.”

종달새의 노래와 시인의 시를 대비시키며, 인간이 만든 예술작품보다 뛰어난 새의 즉흥적인 음악을 찬양하는 것, 자연 예찬은 낭만주의의 한 특징이다.

낭만주의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시대의 양식으로서 낭만주의는 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이 유럽을 휩쓸었던 1800년에서 1850년 사이에 유행한, 이성보다 감성에 의존하던 예술을 일컫는다. 강렬한 정서와 체험에의 욕구,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개성과 창의력 예찬, 자연숭배가 로맨티스트의 삶의 철학이었다.

셸리는 자신보다 네 살 위인 바이런처럼 당대의 관습을 거스르는 충동적이며 비타협적인 삶을 살았다. 셸리는 1792년 영국의 서섹스에서 2남 4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상당한 영지를 소유한 귀족이며 하원의원이었다. 이튼칼리지를 거쳐 셸리는 1810년 옥스퍼드대에 등록했다. 옥스퍼드에서 급진사상에 경도된 그는 1811년에 ‘무신론의 필요성’이란 팸플릿을 익명으로 인쇄해 옥스퍼드대의 교수와 성직자들에게 돌렸다. 유럽문명의 오랜 뿌리인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공격한 열아홉살의 청년은 며칠 뒤에 학교에서 쫓겨나고, 아버지와의 관계도 틀어졌다.

옥스퍼드에서 쫓겨난 셸리는 16살의 소녀 해리엇과 눈이 맞아 스코틀랜드에서 살림을 차렸다. 해리엇과 결혼한 그는 저명한 사회주의 철학자 윌리엄 골드윈과 친교를 맺은 뒤 사회개혁의 의지를 담은 시를 쓴다. 골드윈의 딸 메리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셸리는 1814년 몰래 메리를 데리고 유럽으로 달아난다.

대륙을 여행하다 돈이 떨어진 이들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해 11월에 해리엇은 아들을 낳았고, 이듬해 메리 골드윈이 출산한 미숙아는 2주일 지나 사망했다. 1815년 다시 영국을 떠난 셸리와 메리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인 바이런을 만나 가까이 지낸다. 호수에 배를 띄워 놓고 시를 논하다 바이런이 각자 귀신 이야기를 해 보자고 제안했다. 훗날 메리가 발표한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이날의 유령담이 모체가 됐다.

해리엇이 자살을 시도해 그녀의 시체가 런던의 호수에서 발견되고 3주일 뒤에 셸리는 메리와 결혼해 1818년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1822년 7월 삼십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셸리는 폭풍 속에 배를 띄우고 항해하다 익사체로 발견됐다. 배의 이름은 바이런의 작품에서 따온 ‘돈 주앙’이었다.
2016-11-1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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