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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와 함께 읽는 세계의 명시] 불과 얼음

[최영미와 함께 읽는 세계의 명시] 불과 얼음

입력 2016-10-26 22:08
업데이트 2016-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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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얼음(Fire And Ice)

-로버트 프로스트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이 불로 끝장날 거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얼음으로 끝날 거라고 말하지.

내가 맛본 욕망에 비춰 보면

불로 끝난다는 사람들의 편을 들고 싶어.

그러나 만일 세상이 두 번 멸망한다면,

나는 내가 증오에 대해서도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기에,

파괴하는 데는 얼음도

대단히 위력적이라고 말하겠어.

Some say the world will end in fire,

Some say in ice.

From what I’ve tasted of desire

I hold with those who favor fire.

But if it had to perish twice,

I think I know enough of hate

To say that for destruction ice

Is also great

And would suff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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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
최영미 시인
인류를 파괴하는 증오와 탐욕을 꾸짖는 시다. 이슬람무장세력 IS의 테러를 보도하는 뉴스를 보며 젊은이들의 빗나간 열정과 분노를 생각해 본다. 불과 얼음은 한 몸이니, 증오에서 비롯된 열정이 가장 무섭다.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는 교과서에도 수록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로 유명한 미국의 국민 시인이다. 사춘기의 내가 그 의미도 모르고 좋아한, 여고 시절 나의 시화집을 장식한 시를 다시 들춰 보았다.

*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지.

몸은 하나이니 두 길을 갈 수 없어, 아쉬워하며

한참 서서 한쪽 길을 내려다보았네.

저 멀리 덤불 속으로 길이 구부러져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러다 똑같이 멋진 다른 길을 선택했지,

그 길엔 밟힌 자국이 없이 풀이 무성하게 자라서

…(중략)…

아, 처음 본 길은 다른 날 걸어 보리라! 생각했지

길은 길로 이어지기 마련임을 알지만

언젠가 다시 돌아올 날이 있을까, 나는 의심했다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어디에선가

한숨지으며 나는 그날을 이야기하겠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선택했지.

그러자 내 인생이 달라졌어.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중략)…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오십 년 넘게 시를 쓰고 시를 가르치는 일만 해 온 그도 ‘다른 길’에 대한 회한이 깊었던가. 새로운 시인을 연구할 때, 나는 제일 먼저 생몰연대와 탄생·사망 장소, 그리고 배우자의 숫자와 함께 산 기간을 확인한다.

187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1963년 보스턴에서 88세로 사망했다. 배우자는 한 사람, 고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엘리노어와 스물한 살에 결혼해 사십 년 넘게, 그녀가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았다.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뉴햄프셔의 다트머스대에 등록하고 하버드대도 잠시 다녔지만 학위는 따지 못했다.

시인이 88세? 부모에게서 안정적인 유전자를 물려받아 성격이 좋고, 사교적이고, 세파에 덜 시달렸으리. 도와주는 친구도 많았으리. 학교 교사이며 샌프란시스코 지역 신문의 편집인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프로스트에 대한 나의 편견은 ‘그가 11살 때 아버지가 결핵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을 보고 깨졌다. 그에게도 어느 정도의 비는 내렸다. 아버지가 없는 소년 시절은 혹독했을 게다. 시인으로서 인정받기 전까지 먹고살기 위해 그는 여러 직업을 가졌는데, 신문 배달에 구두수선공으로 일하기도 했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뉴햄프셔의 농장을 경영하다 실패한 그는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간다. 영국에서 에즈라 파운드 같은 현대 시인들과 교류하며 프로스트의 시는 촌티를 벗고 ‘현대화’됐다. 동료 문인들을 돕기로 유명한 사람 좋은 에즈라 파운드가 프로스트의 시를 널리 홍보하고 출판에도 도움을 주었다.

런던에서 첫 시집 ‘소년의 의지’(A Boy’s Will)와 ‘보스턴의 북쪽’(North of Boston)을 출간하고 꽤 알려진 시인이 되어 1915년 그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1920년대에 이미 프로스트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인이 됐다. 남들은 한 번 받기도 어려운 퓰리처상을 네 번이나 수상했고, 1958년에서 1959년까지 미국의 계관시인이었다.

청교도적인 윤리를 서정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던 시인. 자연에서 인생의 상징적인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그는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도시에서 죽은 문명인이었다.

자신의 대통령 취임식에서 축시를 낭송했던 프로스트에 대해 케네디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찬사를 바쳤다. “그는 미국인들이 두고두고 기쁨과 이해를 얻을, 불후의 시들을 국가에 남겨 주었다.”
2016-10-27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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