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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광장] ‘최규선 게이트’ 그후 14년/박홍환 논설위원

[서울광장] ‘최규선 게이트’ 그후 14년/박홍환 논설위원

박홍환 기자
입력 2016-10-21 17:52
업데이트 2016-10-2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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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환 논설위원
박홍환 논설위원
영화 속 명대사는 관객을 몰입시키는 중요한 장치다. 1300만 흥행 대작 ‘베테랑’도 그랬다. 주인공 유아인은 유아독존의 극악한 재벌 2세를 완벽하게 표현했는데 “어이가 없네” 대사는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420만원 때문에 1인 시위를 하는 운전기사에 화가 극도로 치밀었을 때, 그리고 광란의 도주극을 벌인 뒤 마침내 수갑이 채워졌을 때 그는 쓴웃음과 함께 “어이가 없네”라고 독백한다. “너희가 감히…”라며 법과 공권력을 새털처럼 가볍게 여기는 그의 오만과 방종에 관객의 분노지수는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지금 한국 사회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 의심을 받는 최순실씨 모녀가 주인공인 한 편의 ‘상황극’에 집중하고 있다. 최씨는 딸의 제적 위기를 경고하는 이화여대 지도교수에게 “교수 같지도 않은 이런 뭐 같은 게 다 있냐”는 막말도 모자라 ‘정윤회씨 부인’임을 내세워 아예 지도교수를 바꿔 버리기까지 했다. 딸 정유라씨는 또 어떤가.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라며 자신의 이대 입학에 딴지 거는 친구들을 멸시하고 조롱했다. 영화 베테랑의 무법자 재벌 2세와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2002년 4월 대통령 아들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 스캔들이 터졌다. 이른바 ‘최규선 게이트’다. 김대중(DJ) 당시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던 사업가 최규선씨가 DJ의 3남 홍걸씨와 함께 체육복표 사업 등 각종 이권에 개입해 금품을 챙겼다는 의혹이 최씨 운전기사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졌다. 최씨가 거꾸로 운전기사를 공갈 등의 혐의로 고발하고, 청와대 또한 수차례 비밀대책회의를 열어 사건을 무마하려 했지만 결국 대부분의 의혹이 사실로 밝혀져 최씨와 홍걸씨는 사법처리됐다.

책장 한쪽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팽개쳐져 있던 14년 전의 취재수첩을 꺼내 펼쳐 봤다. 또다시 우리 사회에 거대한 비리 스캔들의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의 비슷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궁금했다. 흥미로운 내용이 눈에 박혔다. 기억이 되살아났다.

당시 서울지검 2차장 검사실을 취재하고 있을 때였다. “바빠서 면담할 수 없다”는 말에 부속실 문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한 통의 전화가 다급하게 걸려왔다. 잠시 후 여비서는 “사정비서관이십니다”라며 안으로 내선전화를 연결했다. 사건 배당을 고민하던 서울지검 2차장검사에게 청와대 사정비서관이 전화를 걸어왔다면 뻔한 것이다. 축소 수사 등의 압력 내지는 협조요청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날 당연히 2차장검사 산하인 형사부에 배당되겠거니 생각했지만 예상을 뒤엎고 검찰은 3차장검사 산하의 특수2부에 사건을 맡겼다. 폭로 내용의 구체성, 향후 파장 등을 검토한 끝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고 판단, 정면 승부를 선택한 것임은 물론이다.

지금 온 국민이 최씨 모녀의 안하무인격 언행에 분노하고 있다. 번갯불에 콩 볶듯 순식간에 대기업들로부터 800억원을 뜯어내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을 만들고, 최씨가 사실상 두 재단을 사유화해 기금을 쌈짓돈처럼 이용하려 했다는 의혹과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이번 사건은 ‘최순실 게이트’로 진화하는 중이다.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졌는데 검찰은 소걸음이다. 부동산 고발 사건을 전담하는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에 배당한 것 자체가 14년 전과 대비된다. 수사 의지를 의심하는 여론에 수사 검사를 2명 늘리기는 했지만 소장 검사들이 제대로 거대한 의혹의 실체를 규명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혹여 박 대통령의 오장육부나 다름없다는 최씨의 위세에 눌려 스스로 수사력을 위축시킨 것이라면 더 큰 문제다. 그렇잖아도 이번 사건은 귀와 눈을 틀어막은 고장 난 사정(司正) 시스템으로 인해 더욱 몸집을 키운 정황이 농후한 것 아닌가.

서울지검장을 비롯해 검찰 고위직을 역임한 한 원로 변호사는 “검사는 야생의 늑대 기질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어떤 먹잇감(범죄혐의자)에도 주저없이 발톱을 들이댈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검사의 수사 의무는 형사소송법에도 명백히 규정돼 있다. 떼밀려 마지못해 수사해서는 거악 척결은 난망하다. 공권력의 준엄한 힘을 보여 줘야 무법자 재벌 2세도, 오만한 비선 실세도 더는 우리 사회를 조롱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번 사건 수사가 중요한 이유다.

stinger@seoul.co.kr
2016-10-22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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