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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관계 피로사회의 대안은?/이은경 한국여성변호사회장

[열린세상] 관계 피로사회의 대안은?/이은경 한국여성변호사회장

입력 2016-10-18 18:18
업데이트 2016-10-18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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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한국여성변호사회장
이은경 한국여성변호사회장
바쁜 일상 가운데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야!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 무슨 일이야?” 나는 친구의 말을 채 듣기도 전 전화 건 용건부터 묻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는 “어떻게 지내나 해서. 그냥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어”란다. 아무 용건 없이 그냥 받은 전화. 참 오랜만에 안부 전화를 받은 거다. 나는 그런 전화를 건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아물거린다. 문자, 카톡, SNS 등 온종일 휴대전화를 끼고 살면서도 용건 없는 안부 통화는 좀처럼 하기 어렵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선 용건 없는 대화는 낭비로 느껴질 지경이니 말이다. 사실 스마트폰이 ‘채팅·메신저’ 목적인 사람이 ‘음성·영상 통화’보다 많은 게 현실이다.

심지어 사람 사이의 육성 통화는 점점 사리질 거란 소리조차 들린다. 일상에서 음성 통화를 거의 하지 않든지 통화 자체를 두려워한다는 ‘콜 포비아(call phobia)’ 족도 생겼다. 말 거는 게 두렵고, 말하는 게 싫다고 한다. 오죽하면, ‘전화 기술’을 가르치는 학원이 생겨났겠는가? ‘전화를 겁내지 않는 법’을 물어보는 학생도 제법 있단다.

어디 그뿐인가? 혼밥, 혼술 등 혼자 놀기가 관계 피로사회를 대변한다는 문화로 등장했다. 이 사회 특유의 과도한 경쟁, 타인의 시선 등이 사람을 피로하게 만들었단다. 혼자 노는 문화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사회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진단까지 나온다. 어느새 우리는 ‘말’을 매개로 해온 인간 관계 자체를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전통적으로 인간 관계를 대표하는 두 단어를 꼽으라면 ‘사랑’과 ‘믿음’일 거다. 하나 ‘혼놀족’이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걸 보면 이 사회는 이 둘에 대한 배신감이 꽤 컸나 보다. 하여튼 이 중에서도 더 중요한 걸 택하라면 나는 당연 ‘사랑’을 들고 싶다. 이 둘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종류의 내면 상태다. 사랑이 능동적이라면 믿음은 수동적이다. 사랑은 적극적인 감정과 행동으로 키워 낼 수 있지만, 믿음은 노력만으로 커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란 뜻이다.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이다. 믿음이 수동적인 것처럼 의심도 그러하다. 내 마음에 의심이 들어오면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란 믿음도 허물어진다. 결국 믿음에 근거한 인간 관계는 불안정하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속담처럼 사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관계의 피로는 이 믿음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한다. 그렇다고 관계 맺기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다. 믿음을 뛰어넘는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물론 미움은 아니다. 사랑과 미움은 지대한 관심이 빚어낸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그래서 ‘애증’이라 하지 않는가.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다. 사랑의 대표적인 감정이 바로 ‘관심’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무얼 좋아하는지, 어떤 습관이 있는지, 심지어 오늘 뭘 먹었는지 사랑을 하면 모든 감각이 안테나를 높이 올린다.

비단 사람뿐이랴. 꽃 한 송이를 사랑해도 물을 주고 빛을 쪼인다. 관심을 쏟는 거다. 하나 사랑하지 않으면 시들어 죽어도 상관이 없다.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나와는 상관이 없어지는 거다. 그런데 관심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바로 현대인은 이 관심을 두려워하는 게다. 시간과 노력을 포기해 버린 듯도 하다. 과연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나 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더 멋진 일인가. 관심을 끄고 도움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 게 행복한 삶인가.

관계의 기본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믿음 지키기에 급급하다면 진짜 피로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을 키우는 거라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나’로부터 ‘타인’으로의 시프트다. 그런 사랑은 상대를 위하는 작은 관심을 통해서도 자라난다. 주책없이 간섭하는 사람을 ‘오지랖이 넓다’고 핀잔도 하지만, 그런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사랑이 많다. 사방팔방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 용건이 없어도 좋다. 그냥 조그만 관심이 더 편할지 모르겠다. 전화 한 통처럼. 나는 친구의 안부 전화를 끊고는 다른 친구 전화번호를 찾는다. 얼굴 한번 보려고.
2016-10-1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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