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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윗덩이를 밀고 오르듯, 살아 있는 한 글을 쓰겠소”

“바윗덩이를 밀고 오르듯, 살아 있는 한 글을 쓰겠소”

정서린 기자
정서린 기자
입력 2016-10-17 17:42
업데이트 2016-10-1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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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50주년 맞아 장편 ‘달개비꽃 엄마’&대담집 ‘꽃과 바다’ 등 펴낸 소설가 한승원

“요즘은 마른나무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라우.”

고 이청준 소설가가 한승원(77) 작가의 어머니에게 엎드려 절할 때였다. “아주 강건해 보이십니다, 어르신”이라는 문안 인사에 어머니가 두 손을 어루만지며 나직이 되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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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傘壽·80세)를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한승원 작가는 기성 문단에 대한 아쉬움도 품고 있다. “리얼리즘 소설이 대세일 때 제 소설은 신화적이고 환상적인 리얼리즘의 색채를 띠고 있었어요. 일부 연구자는 제 작품을 폄훼하곤 했죠. 어릴 적부터 바다에 살면서 체득한 생명력이 제 문학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신화, 샤머니즘, 문화인류학 같은 환상적 리얼리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우리 문단의 한계 아닐까요.” 예담 제공
산수(傘壽·80세)를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한승원 작가는 기성 문단에 대한 아쉬움도 품고 있다. “리얼리즘 소설이 대세일 때 제 소설은 신화적이고 환상적인 리얼리즘의 색채를 띠고 있었어요. 일부 연구자는 제 작품을 폄훼하곤 했죠. 어릴 적부터 바다에 살면서 체득한 생명력이 제 문학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신화, 샤머니즘, 문화인류학 같은 환상적 리얼리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우리 문단의 한계 아닐까요.”
예담 제공
마른나무에 흐르는 물소리처럼 생명력 넘치는 신화적 세계, 야만의 역사를 서사로 옮겨온 소설가 한승원이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그의 반세기 문학 여정을 매듭짓는 작품들이 최근 잇따라 나왔다. 새 장편 ‘달개비꽃 엄마’(문학동네), 대담과 에세이를 엮은 ‘꽃과 바다’(예담), 발표작 가운데 작가가 직접 고른 중단편선집 ‘야만과 신화’(예담) 등이다.

‘달개비꽃 엄마’를 두고 작가는 “이때껏 써 온 소설들의 총체”라고 말한다. 3년 전 100세를 한 해 앞두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그를 문학으로 이끈 ‘뿌리’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며칠 몸살을 앓더라도 팔십 리 길을 걸어 어머니를 보러 고향집으로 달려갔어요. 그렇게 강한 자성을 지닌 어머니란 어떤 존재일까, 늘 궁금했어요. 달개비 풀꽃처럼 강인하게 산 한 여인, 세상을 키워 내는 원천이자 우주의 뿌리인 어머니를 (소설을 쓰며) 깊이 읽어 보고 싶었던 거죠.”

그에게 어머니는 “하늘의 저울 같은 균형 감각을 지닌 분”이다. 아홉 남매 가운데 가장 ‘출세’한 둘째 아들에게 평생 동생들 뒷바라지를 주문했다. 고루 잘살아야 한다는 신조 때문이었다. 막내 여동생에게 상계동 아파트를 사 준 것도, 셋방살이하던 큰형님에게 연립주택 분양을 받게 해 준 것도 그였다. 작가가 스스로를 ‘끊임없이 형벌을 받는 시시포스’라 이름 붙인 이유다.

“작품을 하나 쓴다고 하는 것은 산 정상으로 큰 바윗덩어리를 올려놨다가 그것이 굴러떨어지면 다시 굴려 올라가는 일이지요. 저는 평생 그런 바윗덩이를 수없이 밀고 올라가는 형벌을 받은 존재예요. 다달이 빚을 갚고 동생들을 건사하려면 봉급만으로는 안 돼요. 죽으나 사나 글 써서 고료 받고 인세 받고 하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죠. 동생들이 나를 괴롭힌 게 아니라 작가로 세워 준 거죠(웃음).”

요즘 그에겐 노인성 우울증이 엄습한다. 그럴 때 ‘쓰기’는 ‘위안’이다. ‘토굴’이라 부르는 장흥 작업실 바람벽에 ‘광기’(狂氣)라고 써 붙여 놓은 것도 그 때문이다. 육신과 정신은 쇠약해질지라도 예술의 기운과 끼는 놓지 말자는 다짐이다.

“제 나이에는 작가들이 대개 절필을 하잖아요. 하지만 육체적, 정신적 폐경 상태인 노년의 우울증을 가시게 하려고 나는 글을 씁니다. 시는 우울을 이겨 내는 수단이고 소설은 노동이에요. 글을 쓰는 한 살아 있고 살아 있는 한 글을 쓸 것이다. 지금까지 이 생각으로 살아온 거요.”

시와 소설을 오가는 전방위 필력은 딸인 소설가 한강과 닮은꼴이다. 지난 5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이후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는 딸 얘기에 아버지는 “가능하면 이야기를 피하려 한다”면서도 흥얼거리듯 자랑을 풀어놨다.

“그 아이가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그렇잖아요. 그런 면에선 나하고 문학적인 감수성이 비슷한 거죠. 저는 그 아이 작품을 늘 다 읽어 보는데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새로운 세계, 원초적인 인간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더라고요. 아이(한동림, 한강)들의 작품을 보면서 ‘내 것은 낡았나 보다, 새로워져야지’ 공부를 많이 합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2016-10-18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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