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페이지

[데스크 시각] 지진보험 오답을 커닝하셨군요/유영규 금융부 차장

[데스크 시각] 지진보험 오답을 커닝하셨군요/유영규 금융부 차장

유영규 기자
유영규 기자
입력 2016-09-26 22:44
업데이트 2016-09-26 23:25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지난 12일 리히터 규모 5.8의 지진이 경주와 부산 일대를 흔들자 보험사들은 황급히 지진보험의 판매를 중단했다. 회사가 크든 작든 거의 예외는 없었다. 별 도움도 안 되는 상품이 앞으로 애물단지가 될 수 있다는 걱정에서 시작된 일종의 ‘꼬리 자르기’였다. 이런 행태가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자 비난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맑을 땐 우산을 팔더니 비가 오니까 우산을 걷어 간다”며 분노했다. 결국 보험사는 “재판매하겠다”고 백기를 들었다.

유영규 산업부 차장
유영규 산업부 차장
물론 보험사들도 할 말은 있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현재 지진과 관련해서는 보험사의 리스크를 받아 줄 장치도 제도도 전무한 것이 현실”이라면서 “만약 지진으로 대형 건물 1~2채만 무너진다면 어지간한 국내 보험사는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암병동에서 암보험을 팔 순 없지 않냐”고 반문했다. 일부 이해는 가지만 전혀 수긍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그렇게 안전장치 자체가 없는 상황이라면 누가 시키지도 않은 상품을 왜 팔아 왔냐는 점이다. 지진 발생 후 지난 2주간 국내 보험시장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은 한국 보험업계의 민낯을 보여 준다.

“독인지 약인지 알고나 서로 베꼈는지 모르겠네요.” 지진보험 사태 이후 사석에서 만난 한 금융권 인사는 보험업계의 관행에 쓴소리를 던졌다. 사실 보험업계에서 미투(me too·모방) 상품은 이미 오랜 관행이다. 단지 금융상품의 특성상 대형마트 매대 위 ‘허니버터칩’보다 눈에 잘 안 띌 뿐이다. 자동차보험부터 운전자·실손·생명보험까지 예외랄 것 없이 특이한 것이 등장하면 한쪽에서 ‘미투’를 외친다. 때론 인기가 많아서, 때론 명분이나 구색 갖추기가 필요해서 베낀다. 지진보험은 그중 후자에 속한다. 요율은 옆집을 참조하기 일쑤다. 후딱 상품을 풀지 않으면 손님을 놓칠 수 있다는 다급함에 주판알을 튕길 시간에 마케팅을 고민하는 일이 많다.

이렇다 보니 상품 구성은 물론 보험료도 판박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그동안 지진담보특약을 운영한 14개 손해보험사의 연간 보험료는 약속한 듯 약 4000~5000원 수준이다. 안타깝게도 업계에선 사별로 정확한 손해율 자체를 계산해 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국내 지진의 다양한 통계적 특성을 반영한 캣(CAT·대재해 요율 산출) 모델 자체가 없으니 정확한 계산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변명해도 할 말은 없다.

꼭 짚어 볼 대목이 있다. 금융업의 경우 미투 상품이 잘못됐을 때의 파장은 다른 업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점이다. 만에 하나 손해율 계산이 잘못된 상품을 서로 대거 모방했다면 회사 하나가 아닌 업권 전체가 한꺼번에 휘청일 수밖에 없다. 물론 고객들의 자산 피해도 피할 수 없다.

이번 경주 지진을 계기로 금융 당국은 한반도 지진에 대비할 수 있는 ‘한국형 보험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상황이 급해서 또는 지진 대비가 잘됐다는 이유로 미국이나 일본, 터키 등의 지진 보험 시스템을 무조건 들여와서도 안 된다. 이는 결국 또 하나의 ‘미투’일 뿐이다. 보험사들도 붕어빵 같은 보험만을 찍어 내는 베끼기 관행에서 탈피하길 바란다. 옆자리 답안을 무조건 베껴 쓰는 것으로는 결코 실력도 성적도 오를 수 없다. 이미 민망한 경험도 했다. 보험업계는 지진보험에서 이미 서로 틀린 답을 커닝해 고객들에게 판매하는 우를 범했기 때문이다.

whoami@seoul.co.kr
2016-09-27 30면

많이 본 뉴스

의료공백 해법, 지금 선택은?
심각한 의료공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의대 증원을 강행하는 정부와 정책 백지화를 요구하는 의료계가 ‘강대강’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회적 협의체를 만들어 대화를 시작한다
의대 정원 증원을 유예하고 대화한다
정부가 전공의 처벌 절차부터 중단한다
의료계가 사직을 유예하고 대화에 나선다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