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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찾아 무릎꿇은 교황…“신이시여! 동정과 용서를”

아우슈비츠 찾아 무릎꿇은 교황…“신이시여! 동정과 용서를”

입력 2016-07-29 23:40
업데이트 2016-07-29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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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강제수용자 대신 목숨 버린 폴란드 신부 감금시설서 묵상

수인(강제수용자)번호 16670.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막시밀리안 콜베) 폴란드인 신부의 다른 이름은 그것이었다.

나치가 폴란드 아우슈비츠 집단 강제수용소에 가둔 신부는 47세 나이에 다른 탈출 시도 강제수용자를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1941년 8월 15일 수용소 내 화장장에서 불태워졌다.

그로부터 75년이 흐른 2016년 7월 29일, 신부가 당시 지낸 아우슈비츠 지하 감금시설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찾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교황은 바티칸이 진작에 예고한 대로 수 분의 침묵으로 그의 숭고한 죽음을 애도하며 묵상하고 또 묵상했다.

교황의 아우슈비츠 방문은 말 그대로 ‘역사적’이다. 그를 포함하여 역대 교황이 나치 유대인 학살의 이 역사적 장소를 찾은 것은 세 번째다.

그러나 그에 앞서 방문한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인이었고, 베네딕토 16세는 독일인이었다. 나치와 유대인 대학살에 연고가 있었던 그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지만,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연이 없는 이곳을 찾아 몸소 어둠의 역사를 빛으로 덮으며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발신했다.

이에 앞서 오전 숙소인 크라쿠프에서 아우슈비츠수용소로 차를 타고 이동한 교황은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구가 걸린 수용소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애초 계획한 대로 그 문구가 걸린 입구를 통해 홀로 수용소로 걸어 들어간 교황은 온갖 감금시설과 고문 장소, 각종 전시공간 및 화장터 등으로 개장된 역사기념물이기도 한 수용소를 카트에 올라타 둘러보고 몇몇 아우슈비츠 생존자들과도 만났다.

요란스러운 이벤트를 피해 ‘로 키’ 행보를 약속한 교황이 이날 남긴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방문록에 써 놓은 두 문장이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교황은 모국어인 스페인어로 “신이시여, 당신의 백성들(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소서! 신이시여, 이 많은 잔인함을 용서하소서!”라고 적었다.

교황은 이날 생존자 한 명 한 명과 악수하며 몸을 숙여 그들의 양 볼에 입을 맞췄고, 이에 한 여성 생존자는 교황의 손에 입을 맞추면서 가벼운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교황은 그러고는 이른바 죽음의 벽으로 이름 붙여진 곳에서 큰 백색 촛불을 밝히며 나치에 희생된 넋들을 기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어 수용소에서 3㎞ 떨어진 비르케나우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 있던 나치의 집단살해 만행장소도 훑어봤다.

그는 이 자리에선 2차 세계대전 기간 나치의 만행으로부터 폴란드 내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데 크게 역할 한 폴란드 교계 인사 25명을 만나 대화했다.

100세의 한 아우슈비츠 생존자는 교황의 이번 방문에 이은 생존자들과의 만남을 두고 “이번 일은 제게 엄청난 것”이라고 AP 통신에 말했다.

몇몇 생존자는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보여주는 흑백사진을 기념물로 전달하기도 했다고 통신은 덧붙였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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