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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선서 조총련과 맞섰지만…동포 줄면서 조국도 잊더군요

최전선서 조총련과 맞섰지만…동포 줄면서 조국도 잊더군요

이석우 기자
입력 2016-07-20 22:44
업데이트 2016-07-21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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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권익의 ‘마지막 보루’ 굴곡진 역사와 현재 되짚다<상>

일본 땅에서 교포의 권익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로서 모국과의 다리 역할을 해 온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이 올해로 창설 70주년을 맞았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의 격렬한 노선 경쟁, 일본 사회의 차별시정 투쟁 등 민단 70년의 굴곡과 현재의 모습을 ‘재일교포의 요람’으로 불리는 오사카와 도쿄 등의 현지 취재를 통해 바라봤다. 민단은 1946년 10월 3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이란 이름으로 결성됐다. 일본 땅에 설립됐던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이 북한 쪽으로 기울자 이에 반발한 이들이 뜻을 같이한 여러 단체들을 합쳐 민단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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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본조선거류민단’이란 이름으로 1947년 10월 3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민단 창립 1주년 기념 대회 및 개천절 기념식 모습.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제공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이란 이름으로 1947년 10월 3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민단 창립 1주년 기념 대회 및 개천절 기념식 모습.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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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 당시 일본에 남은 한국인은 64만 7000여명이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재일 한국인은 193만 6843명까지 불어났다가 광복 후 귀국 대열에 끼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이었다. 지난 19일 현재 민단 등록자는 33만명(8만 2091세대)으로 집계됐다. 도쿄의 중앙단과 전국 48개 지방본부, 276개 지부를 두고 있다. 이처럼 대단한 재외 국민 조직은 일본 말고는 없다.

그러나 세월의 풍화 속에 주역이 바뀌면서 민단도 흔들리고 있다. 전국적으로 70~80세의 고령이 이끄는 조직이 돼 버렸다. 젊은 세대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 잦은 이사에 어디로 갔는지 파악조차 안되는 경우도 많다.

민단의 위상이 추락한 직접적인 원인 동포 수 감소에 있다. 귀화자까지 포함해 1995년부터 한 해 1만명 이상이 줄었고, 2011년 이후에도 한 해 8000~1만명이 감소했다. 1993년부터 출생자보다 사망자가 많아졌다. 일본 법무성 통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귀화한 재일 한국인은 34만명으로 파악됐다. 1970~80년대에는 해마다 4000~5000명이 귀화하다가 1995~2005년에는 한 해 1만명이 넘게 귀화자가 급증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부금과 단원 회비도 줄고 있다. 단원 20만명이 활동하는 ‘민단의 고향’이란 오사카 등 긴키지방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민단 오사카 본부 관계자는 “수억·수천만엔의 뭉칫돈을 내놓으며 단합을 주도하던 지도자들도 사라져 가고, 지방 말단 지부와 산하 단체들도 슬그머니 없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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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0월 5일 도쿄에서 민단 산하 재일한국청년회 등의 주최로 열린 열린 지문 날인 거부 집회에서 민단 교토본부 하철야 청년회장이 딸을 안고 단상에 올라 “이 아이의 지문은 절대로 찍게 하지 않겠다”고 절규하고 있다. 1980년 첫 거부가 시작된 뒤 줄기찬 재일 한국인들의 거부 운동으로 일본 정부는 1993년 이를 폐지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제공
1984년 10월 5일 도쿄에서 민단 산하 재일한국청년회 등의 주최로 열린 열린 지문 날인 거부 집회에서 민단 교토본부 하철야 청년회장이 딸을 안고 단상에 올라 “이 아이의 지문은 절대로 찍게 하지 않겠다”고 절규하고 있다. 1980년 첫 거부가 시작된 뒤 줄기찬 재일 한국인들의 거부 운동으로 일본 정부는 1993년 이를 폐지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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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정식을 갖고 있는 재일동포 학도의용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나자 일본에서 공부하고 일하던 민단 소속 재일 한국 학생 및 청년 642명이 자원 참전했다. 135명이 전사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제공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정식을 갖고 있는 재일동포 학도의용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나자 일본에서 공부하고 일하던 민단 소속 재일 한국 학생 및 청년 642명이 자원 참전했다. 135명이 전사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제공
1980년대까지는 재일 한국인들은 민단을 거쳐야 재외국민신고도 하고, 여권도 발급받을 수 있어서 조직 유지가 수월했다. 하지만 제도가 바뀐 뒤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조총련과 대척점에서 팽팽하게 맞서던 활력도 시들해지고 있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당시 조총련과의 화합 정책 등이 진행됐지만 지금은 다시 조총련과 거리를 두고 있다.

한 원로 단원은 “대한민국 최전선에서 북한·조총련과 치열한 싸움을 해 왔던 것을 잊어버린 듯하다”며 섭섭해했다. 1959년부터 시작된 북송으로 10만 가까운 재일교포가 북한으로 속아서 넘어갈 때 국교도 없던 그 시기 민단은 시위를 벌이며 북송 저지에 안간힘을 썼다.

“한국전쟁 때 642명의 재일 학도병들이 자유민주주의 편에서 참전, 135명이 산화한 것만으로도 민단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고 민단신문의 배철은 국장은 강조했다.

민단 중앙의 하정남 사무총장은 “모국에선 조총련은 잘 알면서 오히려 민단은 잘 모른다”며 “재일동포의 역사, 민단 역사를 역사책, 교과서에 넣어 주고 알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 총장은 “한·일 국교 정상화 뒤 특별영주권 신청 운동, 조총련계 동포 모국 방문 사업 등도 민단이 벌였고, 지난 5월 재일 한국인에 대한 혐한 발언인 ‘헤이트스피치 해소법’에 대한 일본 내 입법화도 민단 역할이 컸다”고 말했다.

도쿄·오사카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2016-07-21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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