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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구조조정 과정에 채권단 의사 결정 제약 없어야/신성환 한국금융연구원장

[열린세상] 구조조정 과정에 채권단 의사 결정 제약 없어야/신성환 한국금융연구원장

입력 2016-06-02 18:22
업데이트 2016-06-02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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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환 한국금융연구원장
신성환 한국금융연구원장
최근 기업 구조조정과 관련된 은행에서의 충당금 논의는 조지 소로스가 그의 저서 ‘금융의 연금술’에서 언급했던 칼 포퍼의 ‘재귀이론’(再歸理論)을 생각나게 한다. 부실화된 기업을 어떻게 분류하느냐가 기업에 대한 은행의 추가 지원 여부에 영향을 주고 이것이 다시 기업의 상황을 악화시키거나 좀비기업을 연명시키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재귀이론은 원인과 결과가 서로 순환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개념이다. 즉 현실에 대한 시장 참여자들의 인식이 다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주장하는 이론이다. 경제 주체들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매우 합리적이어서 인식이 현실에 영향을 줄 여지가 거의 없는 (경제학계의 주류를 이뤄 왔던) 합리적 기대이론 또는 효율적 시장 가설과는 사뭇 다른 이론이다.

최근 구조조정 대상 기업에 대한 은행의 대손충당금 문제가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다. 대손충당금이란 은행이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은행의 기업여신 금액 중 손실이 예상되는 금액만큼을 별도로 비축해 놓은 일종의 준비금이다. 통상 은행은 기업여신을 정상, 요주의, 고정, 회수의문, 추정손실의 5단계로 분류해 각 분류별로 손실 가능성을 달리 적용해 대손충당금을 적립한다. 여신 분류를 잘못해 대손충당금을 지나치게 적게 적립하면 은행의 수익성이 높게 나오고 건전성도 과대 포장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반면 대손충당금을 지나치게 많이 적립하면 이익이 지나치게 축소돼 은행의 수익창출 능력이 과소 평가되거나 정부에 납부해야 할 세금 금액이 줄어드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여신 분류는 기업의 실제 상황을 최대한 잘 반영해 결정하는 것이 은행의 주주, 감독 당국, 그리고 과세당국 입장에서 가장 바람직하다.

대손충당금 제도가 재귀이론과 연결되는 이유는 부실기업에 지원되는 신규 여신에 대한 의사결정이 기업 여신 분류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현재는 기업 워크아웃이나 채권단 자율협약에 들어간 기업에 지원되는 신규 여신에 대해 기존 여신의 경우와 동일하게 건전성을 분류하는 것이 관행이다. 즉 ‘동일 차주, 동일 건전성’의 원칙에 따라 은행은 새로 제공하는 자금에 대해서도 기존 여신에 상응하는 동일한 비율의 대손충당금을 적립하게 된다. 이 같은 관행 때문에 은행은 신규 자금 지원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게 된다. 신규 자금 지원과 동시에 대손충당금 부담과 건전성 악화가 동시에 나타나니 은행으로서도 곤란한 처지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채권단 주도의 기업 구조조정이 지연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다.

기존 여신이 부실화돼 예상되는 손실이 크게 늘어난 상태에서 신규 여신을 지원하는 이유는 신규 자금 투입을 통해 기업을 정상화시킴으로써 기존 여신과 신규 여신으로부터의 예상 손실이 신규 여신을 지원하지 않는 경우에 비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채권단이 왜 신규 자금을 지원하겠는가. 더욱이 신규 자금을 제공하기 전에 채무재조정을 통해 기존 여신의 일부 또는 전부를 주식으로 출자 전환하거나 신규 여신에 대해 우선변제권이 부여된다면 새로 제공한 자금의 회수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이러한 신규 자금 지원에 대한 논리적 흐름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적립된 기존 여신에 대한 충당금에 더해 신규 여신에 대해서도 동일한 비율의 충당금을 추가로 적립하도록 하는 관행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은행의 자산건전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동일 차주, 동일 건전성’ 등 ‘보수성 원칙’만 고집하는 것은 신규 자금 지원에 대한 의사결정을 왜곡해 기업 구조조정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물론 은행들도 신규 여신을 제공하는 경우 적극적인 심사와 등급 재평가 등을 통해 상황 변화를 신속히 반영해야 한다. 지금 우리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구조조정이 지연된다면 결국 우리나라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은행의 장기적인 건전성 또한 악화될 것이다. 기업 구조조정을 본격 추진하기에 앞서 정책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불필요하게 채권단의 의사결정을 제약하거나 인식의 오류를 유발할 만한 (그래서 재귀성이 발생하는) 걸림돌이 없는지 다시 한번 돌아볼 시점이다.
2016-06-0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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