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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깍두기를 아시나요/정영길 건양대 행정부총장

[열린세상] 깍두기를 아시나요/정영길 건양대 행정부총장

입력 2016-03-14 18:08
업데이트 2016-03-1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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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길 건양대 행정부총장
정영길 건양대 행정부총장
어렸을 적 ‘깍두기’라는 말이 있었다. 동네 아이들끼리 편을 갈라 노는데 종종 형이나 누나를 따라 나온 어린 동생들을 ‘깍두기’라고 부르며 놀이에 같이 끼워 주곤 했다. 깍두기들은 승부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먼저 정예 멤버들이 편을 가른 후 남은 깍두기들을 “너희 가져”라는 식으로 대충 나누곤 했다.

필자도 어릴 적 종종 형을 따라다니며 깍두기가 돼 보기도 하고, 동생을 깍두기로 하여 우리 편에 넣어 함께 놀기도 했다. 사실 동생을 데리고 놀아야 할 때는 가끔은 창피하기도 하고, 같이 있기 싫을 때도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도 책임감이 느껴졌던 것 같다. 내 형도 그랬겠지만….

유아기를 종종 유희연령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놀아야 하는 시기라는 뜻이다. 즉 유아기에는 다양한 놀이를 하면서 앞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기술을 익히게 된다. 놀이를 통해 유아는 사회적 기술과 인지적 전략을 배운다. 또래와 어떻게 어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얻으며, 힘센 형과는 어떻게 지내며, 나보다 어린 동생이나 약자는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를 배우기도 한다. 어린 시절 우리는 놀이에서 ‘깍두기’를 둠으로써 반드시 이기는 것이 다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어울리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배웠다. 만약 이기기 위해 깍두기를 두지 않는다면 당장 어머님한테서 동생을 챙기라는 불호령이 떨어졌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좀 더 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놀이에 동생들을 끼워 주고 함께 노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한편 요즘 대학생들이 대학 생활에서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것이 팀플(조별과제)이다. 거의 모든 교과목에 팀플이 들어 있고, 학점에 반영되기 때문에 팀원으로 능력이 떨어지는 동료가 들어오거나 조금이라도 무임 승차할 것 같으면 매우 싫어한다. 팀플을 하다 보면 동료들의 성향이 금세 파악되는 경우가 많고, 그렇다 보니 그중에서 자연적으로 왕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팀플에 잘 따라오지 못하고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은 바로 ‘민폐’가 돼 버린다.

그러나 이것을 대학생들의 인성 문제나 팀플 제도의 결함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나와 다르거나 능력이 부족한 사람과 어울렸을 때 포용하기보다는 문제아로 낙인찍어 버리는 사회적 구조를 형성한 우리 기성세대, 어른들의 책임이라고 봐야 한다. 나와 다르고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과 함께했을 때도 이기거나 지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 문화일 때 왕따나 민폐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경쟁을 강조하고, 승리를 강조하는 문화에서는 나 혼자만 배려한다고 해서 변화할 것은 없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사람과도 어울리는 것이 나에게 손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 사회문화적 풍토가 형성될 필요가 있다. 땅덩어리는 좁고 천연자원은 없고 오직 있는 거라고는 인력밖에 없는 나라에서 성공하는 길은 경쟁밖에 없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우리 어른들은 달리기에만 집중했지, 달리다 넘어져 뒤처진 동료의 손을 잡고 함께 달리는 법을 잊고 말았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날 어른들은 젊은이들에게 빚이 참 많다.

십여 년 전 필자가 캐나다에 교환교수로 갔을 때의 일이다. 그 대학의 화장실에는 모두 8개 정도의 칸이 있었는데 그 안에 있는 변기의 높이가 제각각이었다. 제일 첫 번째 칸에는 어린 아이들도 이용할 수 있을 만큼 낮은 높이의 변기가 있었고, 맨 끝의 칸에는 웬만한 어른의 발은 바닥에 닿을 것 같지 않은 높은 변기가 있었다. 각각 키가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였다. 획일적이고 동일한 표준에 익숙한 필자에게 여건과 능력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이와 같은 세심한 배려는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조금 덜 잘하거나 못나도 모두가 같이 어울릴 수 있었던 깍두기 문화, 형을 따라 나온 동생을 집에 돌려보내는 대신 어떻게든 같이 어울리려고 했던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해 본다. 우리에게 약자를 위한 문화가 아예 없었던 것이 아니고 그동안 잠시 잊어버리고 있던 것은 아닐까.

일요일 늦은 저녁, 골목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린다. “할머니, 나 7시까지 놀다가 들어갈게요.”
2016-03-1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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