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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미 보다 北 확성기 방송 노래에 더 매료됐던 시절”

“주현미 보다 北 확성기 방송 노래에 더 매료됐던 시절”

입력 2016-01-14 17:02
업데이트 2016-01-1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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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北의 전단은 단순한 선전전 이상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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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마을회관에 주민들이 야산에서 수거한 북한 전단(삐라)을 군경에 전달하기 위해 모아두었다.
14일 오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마을회관에 주민들이 야산에서 수거한 북한 전단(삐라)을 군경에 전달하기 위해 모아두었다.
[데스크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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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운 정치부 차장
이지운 정치부 차장
여명 직전 초병(哨兵)은 늘 괴로웠다. ‘국군 장병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중저음 여성의 목소리는 초병의 몽롱한 정신을 여지없이 긁어 놓았다. 소름마저 돋우는 그 목소리는 15분을 더 들어야 했다. ‘북한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로 기억되는 낭랑한 목소리가 나오기까지. 소리가 뒤섞이고 나면 마음이 편해졌다. ‘왜 우리는 북보다 방송을 늦게 시작할까’가 불만이었다. 지난 9일자 서울신문 1면 보도를 보고 서부전선에서의 초병 생활이 떠올랐다. 남쪽의 확성기 방송에 대한 탈북자들의 소감에 “그들도 그랬구나” 하며 웃음 지었다.
 낮에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노사연의 ‘만남’,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에 설렜다지만, 남쪽의 병사들은 북의 선전가요가 훨씬 흥겨웠다. “그 품을 떠나선 못 살아. 정답게 또다시 불러 보는 우리 김정일 동지”를 후렴구로 하는 노래가 그때는 가장 인기 있었다. 삽질, 낫질, 곡괭이질에 박자 맞추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작업 때면 가끔 고참 중 누군가가 북쪽에 대고 “그 노래 안 틀어 주나?” 하고 했을 정도였다. 주현미나 최진희의 노래보다 더 환영받았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자마자 달려가 현지 안내원 동무들에게 노래 제목을 물었더니 아는 이가 없었다. 후렴구를 불러 줘도 생뚱한 얼굴들이었다. “한참 유행했는데 왜 모르느냐”는 소리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수소문 끝에 최고참 안내원을 찾아 왔다. “오래된 노래인데 어떻게 아느냐”며 노래를 전부 불러 줬다. 그로부터 10년 뒤쯤 베이징 특파원을 가서도 이 노래에 대해서는 비슷한 경험을 했다. 김정일 우상화 작업의 과정에서 나온 곡일 텐데, 몇 년 못 가서 사라진 이유가 지금도 궁금하지만 그래도 제목은 기억에 없다. 대북 확성기를 철수한다고 했을 때도, 방송을 재개한다고 했을 때도 각각의 조치가 어떤 영향을 끼칠지 예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경험들이다.
 북의 4차 핵실험 직후 언론 전반의 보도와 평론은 과거와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당근, 채찍’ 논쟁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북은 어떡하더라도 핵을 가지려 하고 있다는 관측이 압도적이다. 당근으로는 북의 핵 개발을 막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주변국들의 반응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결과론적이지만 그런 점에서 지난해 8·25 합의 이후 대북 방송 재개는 시간문제였다. 이런 점에서라면 북의 다음 반응도 시간문제일 수 있다. ‘국가 존엄’이 모독당했기 때문이다.
 2016년 한반도는 이렇게 긴장의 점증으로 시작하고 있다. 상황이 잘 관리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사회 전반에서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다. 과거 같으면 여러 시나리오가 나올 법한데 현상이 명료해지다 보니 할 수 있는 일도 몇 가지로 오그라들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친구랑 이웃이랑 함께해야 하는데, 미국과 중국은 서로에게 떠넘기는 중이다. “상황이 나빠지면 제가 먼저 나서겠지” 하는 식이다. 또 다른 이웃 일본은 ‘이때다’ 하며 근력운동에 힘쓰고 있다.
 이 실타래의 한쪽 끝을 박근혜 대통령이 먼저 잡아당겼다. 지난 13일 대국민 담화 및 기자회견에서 중국에 ‘할 일’을 촉구했다.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사드도 언급했다. 그제서야 중국이 반응을 보였지만, 사드에 대해서만 원론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친구들이 곧 연합해서 움직이겠지만, 북의 5차 핵실험을 막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암시하고 있다. 이날 “북한군이 또다시 대남 전단을 살포했다”고 합동참모본부가 밝혔다. 수거한 것이 수만 장이라니 한참 뿌린 것 같다. 선전전의 격돌로만 보이지 않는다.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것 같다.
 
 이지운 기자 j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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