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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삶의 폭발과 배반 외상/조성호 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

[열린세상] 삶의 폭발과 배반 외상/조성호 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

입력 2015-12-25 17:48
업데이트 2015-12-25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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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호 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
조성호 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
얼마 전 인천에서는 11살 소녀가 친아버지와 계모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가스 배관을 타고 탈출하는 사건이 있었다. 추운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소녀는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몸무게는 또래 소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16kg에 불과했고, 뼈만 앙상한 팔다리는 온통 멍투성이였다. 발견 당시 소녀의 모습에는 학대와 방임의 흔적이 너무나도 역력했다.

그림 그리기 검사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그림은 극도로 위축된 심리를, 아주 작게 그린 집은 수용의 여지가 극히 희박한 폐쇄 공간으로서의 가정을 나타내는데, 소녀가 구조 후 병원에서 그린 그림이 바로 그랬다. 이 소녀에게 가정은 학대의 온상이었고, 친아버지와 계모는 학대의 원흉이었다. 가장 안심해야 할 가정에서 그리고 가장 믿어야 할 부모에 의해 이 가여운 소녀의 몸과 마음은 멍들어 버린 것이다.

이 소녀가 겪게 될 심리적 후유증은 배반 외상이 핵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한 개인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반당했을 때 겪게 되는 복합적인 심리 현상을 배반 외상이라 부른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용어를 매우 특별한 경우에 국한해 엄격하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배반 외상의 보다 전형적인 예로는 아동·청소년기 동안에 양육자로부터 신체적·정서적 또는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경우를 들 수 있는데, 친부모에 의한 학대와 방임이 가장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적 또는 인위적인 재난으로 인한 외상과 달리 배반 외상은 사람들에 대한 신뢰감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다. 바로 이 부분이 배반 외상이 다른 외상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자녀는 부모를 신뢰하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다. 친부모의 학대는 어린 자녀의 이런 신뢰감을 무참히 짓밟는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큰 상처를 남긴다.

학대와 방임이 지속적이고 악랄할수록, 친부모의 신뢰 악용이 고의적일수록 배반 외상의 후유증은 더 깊어진다. 배반 외상의 이런 특성 때문에 피해 아동은 고립된 삶을 살아가기가 매우 쉽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보일지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거나 신뢰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어린 소녀가 앞으로 살게 될 삶의 일부다. 무척이나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배반 외상에서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은 어떻게 부모가 자녀를 그렇게 대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각계의 전문가들이 여러 가지 진단과 평가를 내놓고 있지만, 한 가지는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저명한 정신분석가인 에리히 프롬이 말했던 ‘삶의 폭발로서의 파괴성’이다. 프롬에 따르면 인간이 정신적인 파탄 상태를 스스로 견뎌 내지 못할 때 극히 비정상적인 파괴성이 나타난다. 이런 파괴성은 한번 발동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대상이 누구이든 파괴하고 제거해 버린다. 특히 자신을 보호하는 대항력을 가지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이 파괴의 대상이 되기 쉬운데, 불행하게도 이번 사건의 경우는 자신의 친아버지를 신뢰했던 소녀가 파괴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지하의 들끓는 마그마를 지표면이 감당하지 못할 때 화산이 폭발해 버리듯 삶의 장애를 자아가 견뎌 내지 못할 때 삶이 폭발하게 된다. 극심한 고립감과 무력감, 연이은 실패와 좌절, 그리고 절망감이 삶을 폭발하게 만드는 주된 심리적 장애 요소들이다. 소녀 친아버지의 생활 행적은 삶의 장애를 감당해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그것과 매우 닮았다.

그 어떤 이유로도 친아버지의 학대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지만, 그의 삶이 폭발해 버린 연유와 과정에 눈길이 쏠리는 것은 필자의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인가 보다. 소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처벌해 달라고. 하지만 우리 자신은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가? 소녀의 친아버지와 우리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라고. 세상에 완전히 선한 사람이나 완전히 악한 사람은 없다. 우리는 삶의 상황에 따라 선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눈을 돌려 우리 사회를 보면 삶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조마조마하다.
2015-12-2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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