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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역사는 심리학이다/조성호 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

[열린세상] 역사는 심리학이다/조성호 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

입력 2015-10-22 23:08
업데이트 2015-10-23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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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과거 경험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보다 강조하는 부분이 있고, 간단히 언급만 하거나, 생략해 버리는 부분도 있다. 과거의 일들을 현재의 관점에서 유리하게 평가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아무리 진정한 참회록이라 하더라도 불미스러운 과거사가 모두 다 기록되지는 않는다. 인정할 수 있는 것만 인정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아예 의식조차 하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 심리이기 때문이다.

조성호 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
조성호 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

소설가 이병주는 대하소설 ‘산하’의 끝자락에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기록자로서의 소설가라는 평가를 받는 그에게 역사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들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다. 현재의 관점에서 선별되고, 강조되고, 채색된 기록이 역사인 것이다. 그 외의 다른 과거의 일들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가 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현대의 관점에서 씌어진 사회의 자서전이다. 그렇기에 개인의 자서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심리적 편향들이 사회의 자서전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 개인의 자서전이건 사회의 자서전이건 주관의 편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역사가들의 진술과 법정에서의 목격자 진술은 비슷한 점이 많다. 지나간 사건에 대해 진술한다는 점과 진술의 결과가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흥미로운 점은 교통사고 목격자들이 동일한 사건을 목격했음에도 서로 다른 진술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진실을 말하는지, 아니면 거짓을 말하는지의 차원에서 따질 일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사건을 지각하고 기억하고 진술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개인차와 편향은 매우 일반적인 심리 현상이다. 역사가들의 진술에서도 관점의 차이에 따라 과거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역사 인식과 관련해 매우 흥미로운 심리학 연구가 있다. 2006년에 발표된 한 연구에서는 7개 국가 1300여명의 대학생과 성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세계적 사건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졌다. 응답을 분석한 결과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인식 차이가 발견됐다. 예를 들어 성별과 연령대에 따라, 그리고 자신이 속한 문화에 따라 중요하다고 응답한 세계적 사건들이 각기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개인적 또는 사회적 처지에 따라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법관이 재판을 할 때, 언론이 보도할 때, 그리고 심사위원이 평가를 할 때 객관성과 공정성이 얼마나 발휘되는지는 늘 초미의 관심사가 된다. 이런 중요한 일들에 우리 사회가 발전시켜 온 최선의 방안은 다양한 관점과 시각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배심원 제도, 다양한 언론기관, 복수의 심사위원이 몇 가지 예가 된다. 단 한 명의 법관과 심사위원, 그리고 하나뿐인 언론이 범할 수 있는 주관적 편향과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역사가들이 과거의 사건들을 모두 동일하게 인식하고 해석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근대사뿐 아니라 멀리는 상고사(上古史)에서부터 가깝게는 바로 얼마 전의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역사가들의 역사관이 한결같지 않음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역사가 개개인의 역사 서술은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는 진실일지라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도 절대적 진실이 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가 특정하게 선정된 일부 역사가에게 우리 사회 전체의 역사 서술을 일률적으로 맡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유일하게 옳고, 정당하고, 바람직한 역사관이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역사를 바라보는 좀 더 균형 잡힌 자세는 다양한 시각과 해석에 대한 열린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가 정부가 정한 역사만이 유일하게 옳은 역사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달빛에 물든, 모든 잊혀진 선조들의 신화적 삶을 태양의 뒤꼍으로 영원히 퇴장시켜 버리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모두에게 진실인 유일한 역사는 없다. 선조들의 수만큼 과거 일들이 있고, 역사가들의 수만큼 역사들이 있을 뿐이다.
2015-10-2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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