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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범선 전함 ‘테메레르’의 운명과 복지논쟁/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열린세상] 범선 전함 ‘테메레르’의 운명과 복지논쟁/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입력 2015-09-21 23:04
업데이트 2015-09-21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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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의 거장인 윌리엄 터너의 그림 ‘전함 테메레르’는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크게 활약했던 범선이 소재다. 나폴레옹 주축의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함대의 영국 침공 시도를 좌절시킨 넬슨 제독의 영국 함대 주력 범선 전투함이 ‘테메레르’다. 산업혁명으로 증기선 시대가 도래하면서 범선 시대의 종말을 알려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규모가 훨씬 작은 증기선에 예인돼 ‘해체를 위해 최후의 정박지로 끌려가는 전함 테메레르’가 그림의 주제라서 그렇다.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테메레르’의 장례 행렬과도 같다(그림 속의 경제학, 141쪽).

산업화로 인구가 대거 도시로 유입되며 전통적인 부양 체계가 붕괴함에 따라 등장한 것이 서구 사회보장제도의 출발점이다. 도입 이후 200년 이상 경과한 지금 제도 도입 당시와는 비교조차 어려울 정도로 늘어난 평균수명 등 급변한 사회·경제여건 변화 속에서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원조 사회보장 국가들은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고 있다.

산업혁명 와중에서 사회보장제도를 처음 도입한 국가가 독일이다 보니 독일에 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독일은 남성 근로자 한 사람만 일해도 퇴직 후 한 가족이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관대한 사회보장제도를 운영해 왔다. 비스마르크 모형으로 불리는 독일 제도는 오랫동안 중요한 복지 모형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관대한 독일 모형이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 사회보장제도의 토대를 형성하다 보니 독일의 제도 변화에 촉각을 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몇 차례 시행착오를 거쳐 독일은 2004년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장기보험인지라 상당한 기간이 지나서야 문제점이 드러나는 속성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쉽게 악용되는 공적연금제도에 정치적 판단이 개입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것이다. 평균수명 증가로 연금받는 기간이 늘어나 부양 부담은 늘어나나, 경제성장률과 출산율이 떨어져 부양 능력이 하락하게 되면 줄어든 국가의 부양 능력만큼 자동으로 연금액을 줄이는 자동 안전장치를 도입한 것이다.

소모적인 정치적 논쟁 대신 매년 국가 ‘독일호’의 실적을 바탕으로 연금액을 자동 조절하는 것이다. 이미 연금을 받는 수급자까지 포함해 운영하는 순도 100%짜리 자동 안전장치다. 이런 식으로 제도를 운영하다 보니 과거 높았던 소득대체율(근로기간 월급 대비 연금액의 비율)이 어느새 40% 초반으로 떨어졌다. 부담하는 보험료가 19%를 넘나드는데도 말이다.

과거 관대했던 시절의 독일과 유사한 수준으로 도입된 우리 국민연금은 두 차례 개혁으로 2015년 소득대체율이 46.5%로 낮아졌다. 매년 0.5% 포인트씩 하락해 2028년에는 40%까지 낮아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이 너무 낮아 국민연금을 받아도 노후빈곤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독일은 이미 남성 근로자의 평균 가입 기간이 35∼40년이지만, 우리는 향후 30∼40년 뒤에도 25년 정도에 불과할 것으로 전망되다 보니 실제 가입 기간이 독일의 절반에 불과해 노후빈곤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미 독일과 우리의 평균수명에는 큰 차이가 없다. 평균수명은 비슷한데 30∼40년 뒤에도 일한 기간, 즉 보험료를 납부한 연금가입 기간이 절반에 불과하다면 인생 백세시대에 ‘대한민국호’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낯익은 과거의 독일 연금제도를 증기선에 밀려 해체되는 운명의 범선 전투함 ‘테메레르’호로 봐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늘어난 평균수명만큼 오래 일해 실제 가입 기간을 늘릴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발전 방향을 잡는 것이 올바른 접근이 아닐까.

소득대체율은 독일보다 더 높으면서도 정작 부담하는 보험료는 독일의 절반에 불과한 우리 현실을 더 우려스럽게 봐야 할 것 같다. 부담 수준은 거론하지 않으며 어렵게 낮춘 소득대체율을 다시 50%로 올리자는 주장이 우려되는 이유다. 9월부터 본격 가동되고 있는 ‘공적연금 강화 및 노후빈곤 해소를 위한 사회적 기구’에서 이러한 우려를 고려한 미래 지향적인 논의가 이뤄지기를 기대해 본다.

2015-09-22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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