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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법의 여신은 눈물을 모른다/조성호 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

[열린세상] 법의 여신은 눈물을 모른다/조성호 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

입력 2015-09-14 18:04
업데이트 2015-09-1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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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호 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
조성호 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
가해자들을 처벌할 수 없었다. 그들로부터 배상을 받아 낼 수도 없었다. 문제는 ‘법’이었다. 그 ‘법’ 때문에 가해자들을 정의의 법정에 세울 수 없었다. 피해 여성은 자살하고, 그 여동생마저도 자살하고, 아버지는 뇌출혈로 생을 마감하고, 남은 이라고는 어머니뿐인, 이 풍비박산 난 가정을 두고 법의 여신 ‘디케’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이 여신이 수호하고자 하는 것은 정의인가. 아니면 법 자체인가.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심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피해 여성은 2004년 여동생의 권유로 드라마 보조출연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현장반장, 부장, 캐스팅 담당자 등 12명의 방송 스태프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들은 여동생을 팔아넘기거나 어머니를 살해하겠다고 협박하며 피해 여성을 모텔에 감금해 성폭행하고, 변태 성행위까지 강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 여성은 고소했지만, 2년 만에 고소를 취하하게 된다. 가해자들의 완강한 부인 속에 “사건을 다시 기억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성폭행 관련 법률은 친고죄여서 수사는 중단됐고, 가해자들에 대한 형사적 단죄의 기회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결국 피해자는 자살에 이르고, 여동생 역시 자살했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아버지도 충격에 휩싸여 뇌출혈로 세상을 하직했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민사소송을 제기했지만, 재판부는 민법상 3년의 소멸시효가 지났다며 소를 기각하기에 이른다. 약 2주 전 내려진 민사재판의 결론이다.

어떤 법체계가 정의를 수호하지 못한다면 그 법체계는 권위를 잃고 말 것이다. 정의를 외면하는 법은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법이 수호해야 할 정의란 무엇인가. 다양한 대답이 있을 수 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죄가 있는 곳에 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의 법체계가 고차원적인 도덕률이 아닌 이상 죄를 눈감아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용서, 화해 등과 같은 일들은 인간의 도덕적 수양의 문제이지 현실 법의 문제는 아니다. 옳은 일은 보호하고, 그른 일은 단죄하는 것이 현실 법이 추구해야 할 바인 것이다.

인류에게 가장 기본적이고도 오래된 정의관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체계를 갖춘 최초의 법전 중 하나로 알려진 함무라비법전은 기원전 17세기 바빌로니아의 제6대 왕 함무라비가 제정한 것인데, 2m가 조금 넘는 돌기둥에 새겨진 282개 법조문 중에서 특히 다음의 두 조항, 즉 ‘다른 사람의 눈을 상하게 했을 때는 가해자의 눈도 상해져야 하고’(196조), ‘다른 사람의 이를 상하게 했을 때는 가해자의 이도 상해져야 한다’(200조)는 것이 유명하다. 유사한 내용이 우리나라 최초의 법으로 알려져 있는 고조선 시대의 팔조금법(八條禁法)에서도 발견된다. ‘사람을 죽인 자는 죽여서 다스린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동태복수법(同態讐法)의 정의관은 인간의 발달 과정에서도 발견된다. 발달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만 4세 이전의 아동은 상대방으로부터 가해를 당했을 때 동일한 형태의 보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즉 누군가가 자신을 발로 찬다면 자신 역시 상대방을 발로 차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처지나 사정을 헤아리거나 하는 등의 좀 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사고는 한참의 발달 과정을 거친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정의의 여신이기도 한 ‘디케’의 양손에는 저울과 칼이 들려져 있고, 두 눈은 천으로 가려져 있다. 엄정한 정의의 기준으로 추상과 같이 정의를 실현하되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로지 정의의 본질에만 입각한다는 것을 이 여신은 상징한다. 이 비극적 사건에서 법의 보호를 받은 것은 누구인가. 친고죄라는 형법적 조항과 3년의 소멸시효라는 민법적 근거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12명의 가해자는 세 명의 목숨을 연이어 죽음에 이르게 하고, 한 가정을 완전히 파탄 내버린 범죄를 저지르고도 단 하루의 감옥 생활과 단 1원의 손해배상을 하지 않았다. 최소한 이 사건에서만큼은 법은 가해자 편이었다는 점이 분명해 보인다. 이런 법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묻게 된다. ‘과연 정의는 살아 있는가’라고. 법의 여신 ‘디케’의 두 눈은 여전히 가려져 있고, 정의를 갈망하는 우리들의 눈에서만 눈물이 흐른다.
2015-09-1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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