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7] ‘지리산 시인’ 양대박과 실상사

입력 : ㅣ 수정 : 2015-08-2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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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전경.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 증각대사 홍척이 창건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였다. 큰법당인 보광전 앞에 한쌍의 삼층석탑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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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상사 전경.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 증각대사 홍척이 창건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였다. 큰법당인 보광전 앞에 한쌍의 삼층석탑이 세워졌다.

청계(靑溪) 양대박(梁大樸·1543~1592)은 평생을 시인으로 살았지만 의병장으로도 유명하다. 남원 출신의 청계는 아버지가 종3품 사헌부집의를 지냈음에도 서자라는 신분상의 한계로 일찌감치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명산대천을 유람하고 시를 쓰면서 청계도인(靑溪道人)을 자처하며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실상사 동구 해탈교에서 바라본 만수천. 만수천은 노고단에서 발원하여 달궁계곡을 거쳐 실상사를 지난다. 이후 남강으로 흘러들어 낙동강과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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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상사 동구 해탈교에서 바라본 만수천. 만수천은 노고단에서 발원하여 달궁계곡을 거쳐 실상사를 지난다. 이후 남강으로 흘러들어 낙동강과 합류한다.

청계는 낮에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히고 밤에는 병서를 읽기도 했다. 누군가 “태평성대에 어찌 병서를 읽습니까.”하고 물으면 “통달한 선비라면 모든 책을 다 읽어야 하고, 모든 일을 다 알아두어야 하지요.”라고 답했다. 남원부가 선조 16년(1583) 광한루를 대대적으로 중건하자, “십 년 안에 불타 버릴 터이니, 성밑에 도랑을 파거나 진지를 쌓느니만 못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양대박장군 부자충의문. 임진전쟁 당시 의병을 일으킨 양대박과 7000석의 군량미를 의병군에 내준 그의 아들 양경우의 충절을 기려 고향마을인 남원 주생면 상동리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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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대박장군 부자충의문. 임진전쟁 당시 의병을 일으킨 양대박과 7000석의 군량미를 의병군에 내준 그의 아들 양경우의 충절을 기려 고향마을인 남원 주생면 상동리에 세워졌다.

임진전쟁이 일어나자 청계는 아들 경우와 50명 남짓한 집안 일꾼으로 의병을 일으킨다. 고경명이 담양에서 의병의 기치를 들자 흔쾌히 그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세우고 스스로는 부장(副長)으로 몸을 낮추었다. 이들은 임실 운암에서 왜군과 대적하는데, 벤 적이 1300급에 노획한 말이 100필에 이르는 대승이었다. 임진전쟁 당시 호남의병이 거둔 최초의 승리로 기록됐다.

충장공 양대박장군 운암승전비. 양대박이 부장(副長)을 맡은 의병이 왜군에 대승을 거둔 임실 운암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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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장공 양대박장군 운암승전비. 양대박이 부장(副長)을 맡은 의병이 왜군에 대승을 거둔 임실 운암에 세워졌다.

하지만 청계는 음력 6월 무더위에 시달리며 과로한 탓에 갑자기 병을 얻었다. 그는 진중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내가 꿈에 하늘에 올라가 상제께 울며 빌었더니 상제께서 신병(神兵)을 보내 도적들을 모조리 소탕하라 명하셨다.”며 의병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승전을 거둔 곳에 ‘충장공 양대박 장군 운암승전비’가 세워졌다. 양대박 승전비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손에 훼손됐다가, 최근 새로운 터에 다시 세워지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양대박이 지리산 유람 도중 들른 백장암. 새로 지은 대웅전과 고색창연한 삼층석탑 및 석등이 세월을 뛰어넘어 자연스러워 보인다. 아름다운 삼층석탑은 국보 제10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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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대박이 지리산 유람 도중 들른 백장암. 새로 지은 대웅전과 고색창연한 삼층석탑 및 석등이 세월을 뛰어넘어 자연스러워 보인다. 아름다운 삼층석탑은 국보 제10호로 지정됐다.

청계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청계’(靑溪)는 한말 언론인 장지연이 1917년 발간한 ‘대동시선(大東詩選)’에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시는 선조 39년(1606)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삼가 손을 씻고서 읽었다.’고 했을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다.

청계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유람이다. ‘금강산 기행록’과 30편의 한시를 남긴데 이어 모두 네 차례 지리산을 유람한다. 특히 선조 19년(1586) 가을에는 운봉과 황산, 인월, 백장사를 거쳐 실상사와 군자사, 용유담을 지나 천왕봉에 오르는 11일동안의 본격적인 지리산행에 나선다. 친구인 춘간 오적과 삼촌인 양길보에 소리꾼 애춘과 아쟁을 타고 피리를 부는 수개와 생이도 동행했다. 이 때 남긴 것이 ‘두류산 기행록’과 13편의 한시다. ‘폐허가 된 실상사 옛터’(實相寺廢基)도 이 가운데 하나다. 실상사는 양대박의 지리산 유람에 중요한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흥하고 망함은 한결같이 참 사유의 지침이요

 밝고 어두움은 천 겁 세월의 먼지이네

 용천(龍天)들도 또한 사라져 없어지고

 금지(金地)는 이미 잡목 숲이 되었네

 돌이끼 무성한 비석에는 글자 하나 남아있지 않고

 산은 텅 비었는데 불상만 덩그라니 앉아 있네

 흐르는 시내 다정도 할사

 울며불며 가는 길손 전송하네.

 

실상사 철조여래좌상(문화재청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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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상사 철조여래좌상(문화재청 사진)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두류산 기행록’에 따르면 실상사는 청계의 유람 당시로부터 100년 전 쯤 병화로 소실되었는데, 깨진 비석은 길옆에 쓰러져 있었고 전각은 모두 불타버려 철불도 벌판의 대좌 위에 그저 앉아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양대박을 두고 왜 뛰어난 시인이라고 평가하는지는 이 시를 읽으며 실상사에 가보면 누구나 실감할 수 있다. 길손을 전송하던 실상사 동구의 시내는 청계의 시대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불타버린 절집에 외롭게 앉아있던 철불은 이제 실상사를 상징하는 존재나 다름없다.

글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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