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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너무 익숙한/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문화마당] 너무 익숙한/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입력 2015-04-30 00:48
업데이트 2015-04-30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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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넘게 해외에서 살다가 귀국해서 겪은 음식 맛 경험이 요즘 자꾸 머리를 맴돈다. 귀국해서 얼마 동안은 예전에 좋아하던 음식들을 부지런히 먹었다. 식당에서도 먹었고 길거리에서도 먹었다. 그러나 그런 감흥은 오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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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처음엔 맛도 제대로 모른 채 그저 추억에 젖어 먹었지만 흥분이 가실 즈음인 한두 달 뒤로는 음식 맛이 예전에 비해 너무 달다는 것을 느꼈다.

우선 짜장면 맛이 그랬다. 서울에 돌아온 초기에 처음 두어 번은 오래간만에 먹는다는 흥분(?) 때문에 맛을 제대로 못 느꼈지만, 서너 번 먹다 보니 너무 달아서 먹기 거북할 정도였다. 그래서 짬뽕을 시켜 먹었는데, 짬뽕도 예전에 비하면 상당히 달게 느껴졌다.

이뿐만 아니라, 서민들이 즐겨 먹는 거의 모든 음식이 대체로 너무 달다는 느낌을 받았다. 탕수육 소스를 비롯해 길거리 튀김과 어묵 꼬치의 국물, 떡볶이, 식당의 각종 국물, 전골, 만두, 일부 김치, 물냉면, 비빔국수, 각종 나물 반찬 등 한결같이 예전보다 달았다.

고기구이 식당에서 제공하는 각종 소스도 꽤 달았다. 말로는 자기네가 개발한 소스라는데, 고기 없이 맨입에 맛을 보면 너무 달았고, 고기를 찍어 먹어도 달았다. 전통 방식의 불고기조차 예전보다 달았다. 순대를 찍어 먹는 소금도 달았다. 아마 설탕도 조금 섞었지 싶다.

내 입맛이 그동안 해외에서 바뀌었을지 몰라 주변 분들에게 두루 물어보았다. 다수는 맛에 무딘 이들인지, 지난 15년 사이에 일어난 음식 맛의 조용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내 입맛을 탓했다.

내 입맛은 여전히 서민적이고 털털한 편에 속하는데도, 입이 짧고 까다롭다는 오해 아닌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래도 일부 예민한 이들이 있어, 그동안 한국음식이 많이 달아졌음을 인정하며 내게 공감을 표했다.

실제로 요즘 한국 음식은 대체로 너무 달다. TV 요리 프로그램을 보아도 거의 모든 음식에 설탕이나 조청 투입은 기본인데, 화면상으로도 ‘엄청난’ 양을 서슴지 않고 투하한다. 각종 소스는 달달함 그 자체이고, 서민 음식일수록 화학조미료가 맛을 좌우한다. 그러니 달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많은 한국인들은 왜 이런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으레 그러려니 하며 맛나게 점심을 사먹을까.

그건 바로 그 변화가 매우 서서히 조금씩 진행되다 보니, 그것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한국 음식 자체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만약 15년간 밖에 나가 있지 않았다면, 음식 맛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요즘 ‘성완종 리스트’ 뇌물 사건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다. 파렴치한 범법행위를 자행하고도, 외부 압력에 견딜 수 없을 만큼 궁지에 몰리지 않고는 사실을 시인하고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100만원 이상의 금액은 순수한 선물일 수 없으니 뇌물로 인정해 처벌하자는 ‘김영란법’이 우여곡절 끝에 지난 3월 간신히 국회를 통과한 것이 현실이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은 이제 막 절대부패 수준을 벗어난 데 불과한데도, 해외 선진국에서 바라보면 한국의 부패구조는 여전히 심각한 수준임에도 내부의 우리들은 무덤덤하다. 부패에 너무 무디다.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익숙하면 편하지만 편한 것만 찾다 보면 그 사회 자체가 몰락할 수도 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2015-04-3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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