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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 끝’ 박은선 “그래도 축구하길 잘했어”

‘방황 끝’ 박은선 “그래도 축구하길 잘했어”

입력 2014-12-23 07:10
업데이트 2014-12-23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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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하는 박은선
인터뷰하는 박은선 22일 서울 송파구 한 카페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는 박은선. 축구하면서 수없이 많은 굴곡을 겪은 그는 ”그래도 축구하길 잘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박은선(28·로시얀카)은 한국 남녀 축구선수를 통틀어 가장 많은 굴곡을 겪은 선수 중 한 명일 터다.

탄탄한 체격 조건과 공격적인 플레이 덕분에 국내 여자 축구계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파리 생제르맹)라고 불릴 정도로 화려한 실력을 뽐내지만, 실업 초기 시절에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팀을 자주 이탈해 ‘풍운아’로 불렸다.

마음을 다잡고 2012년부터 이탈 없이 숙소 생활을 했지만, 이듬해 여자실업축구 WK리그 구단 감독들이 그의 성별에 의문을 제기하며 성별검사를 요구해 마음고생 했다.

어찌 보면 지독한 축구와의 인연에 대해 박은선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러시아 진출 첫해 리그를 마치고 이달 초 돌아온 박은선과 연락하기는 쉽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러시아 휴대전화를 쓰는 그는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만 연락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22일 서울 송파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다음은 박은선과의 일문일답.

-- 축구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 축구, 농구 등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학교에서 체육대회를 하면 반 대표로 나가곤 했다. 그러던중 아는 오빠들과 공 차고 놀고 있는데 창덕여중 감독님과 코치님이 ‘제대로’ 공 차볼 생각 없느냐고 물어보셨다. 학교 체육 선생님과도 아는 사이시더라. 부모님은 계집애가 웬 축구냐며 말리셨다. (웃음) 그래도 내가 활발하고 운동 좋아하는 것을 아시니까 결국에는 허락하셨다. 축구를 하면서 집에서 3분 거리인 옥수동 옥정중에서 서대문에 있는 창덕여중으로 전학을 갔다. 중학교 1학년에서 2학년 넘어갈 때 동계훈련 받으며 본격적으로 운동하기 시작했다. 운동을 정말 좋아했다. 키도 많이 컸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150㎝대였는데 중 3때부터 키가 쭉쭉 자랐다. 처음에 말리던 아버지도 나중에는 학교에 자주 데려다 주시곤 하셨다.

-- 왜 축구였나.

▲ 농구도 좋아하긴 했는데 키가 작아서 포기했다. 키 작아도 할 수 있는 축구가 더 나아 보였다.(웃음) 부모님과 처음으로 떨어져 숙소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선후배들이 어울려 지내는 것이 재밌었다. 처음에는 정말 시간 가는 줄도 모를 만큼 재밌었다.

-- 처음으로 재능이 있다고 느낀 때는.

▲ 솔직히 재능을 빨리 발견한 편은 아니다. 고 2∼3학년 때 청소년대표가 돼 그때부터 골을 넣기 시작했지만 (그 때문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당황스러웠다. 언론에서 띄워줘서 내가 진짜 잘하는 것처럼 믿는 건 아닌지, 잠깐 반짝하는 건 아닌지 조심스러웠다. 아직도 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항상 뭔가가 부족하다. 완벽주의는 아닌데 이런 말을 할 때는 조금 조심스럽게 된다.

-- 어쨌든 주목받으며 10대에 출발은 좋았는데 곧 풍운아로 불렸다. 정당한 별명이라고 생각하나.

▲ 맞는 말이다. 한동안 방황을 많이 했으니까.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별명이 그리 나쁘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 그것도 다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 실업팀 입단하고 초기에 팀을 이탈하기 일쑤였다는데 그땐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었나.

▲ 실업팀 들어가면서 징계를 받았는데 그때 스트레스 때문에 나가게 됐다.(박은선은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해 2년을 뛰어야 한다는 한국여자축구연맹 규정을 어기고 위례정산고 졸업 직후 2005년 서울시청에 입단, 연맹으로부터 3개 대회 출전정지 징계를 받았다. 박은선 측이 법적 대응에 들어가고 팬들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낸 끝에 징계는 2006년 4월 철회됐다.) 이후에는 조금만 힘들고 짜증 나면 팀을 이탈하는 게 습관처럼 됐다. 돌아보면 스무살이고 책임져야 할 나이인데도 그땐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나갔다. 그런데 나갈 때도 운동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조금만 쉬다 와야지 그런 생각만 했다.

-- 얼마나 오래 팀을 이탈했었는지.

▲ 짧게는 보름 정도, 길게는 1년6개월까지 나가 있었다. 가장 길게 나간 것은 마지막으로 팀을 이탈한 24∼25살쯤이었다. 딱히 어떤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축구하면서 쌓인 스트레스가 그때 폭발했다. 축구도 싫고 사람도 싫었다. 쉬면서는 아예 운동을 하지 않았다. 축구도 안 보고, 경기장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땐 정말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다.

-- 어떤 아르바이트를 해봤는지.

▲ 잠실야구장 야구용품 파는 곳에서 일했다. 사장님도 잘 해주셔서 재밌게 일했다. 내가 운동 말고도 할 수 있는 게 있구나 생각했다.(웃음) 게임을 좋아해서 PC방 아르바이트도 했다.

-- 어떻게 돌아오게 됐는지.

▲ 언니, 오빠는 어떤 선택을 하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후회하지 말라고 했는데 부모님은 내가 항상 운동하길 바랐다. 7년째 알고 지내는 친한 친구들이나 팀 언니들 등 주변에서도 많이 도와줬다. 원래 힘들다고 잘 얘기하지 않고 혼자 풀려고 하는 편인데 주변에서 함께 울고 웃어주고 그래서 쌓인 게 많이 풀렸다.

몇 번 나갔는지 세보지도 않았다. 축구한 지 15년 정도 되는데 그 가운데 실제로 운동하지 않은 기간이 3∼4년 정도는 되는 것 같다.

-- 자주 팀을 이탈했으니 동료들이 미워할 법도 하다.

▲ 운동하면서 숙소 생활할 때는 나무랄 데 없이 좋았다. 스무 살 때 들어가서 다 선배였는데 내가 어려서 언니들이 많이 챙겨줬다. 팀을 나갔다 왔을 때도 언니들이 미워할 법도 한데 웃으면서 받아줬다. 물론 혼내기도 했지만 잘 타일러줬다. 언니들한테 정말 고마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정말 어렸던 것 같다.

-- 서정호 전 서울시청 감독 말에 따르면 플레이를 지적하면 다시 공을 차려 들지 않을 정도로 자존심이 셌다고 하더라. 다시 돌아올 때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던가.

▲ 자신 없었으면 운동을 다시 하지 않았을 것이다. 준비만 잘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팀을 나갔다가 돌아오고 나서는 정말 열심히 했다. 원래 개인 운동을 잘 하지 않았는데 쉬면서 근육이 많이 풀린 상태여서 혼자 훈련을 하곤 했다. 팀 훈련이 없는 새벽, 야간에 조깅, 웨이트 트레이닝을 많이 했다.

-- 그렇게 준비하고 돌아와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 ‘박라탄’ 별명에 걸맞은 활약도 하고.

▲ 어떻게 그 별명이 나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이상한(?) 플레이를 많이 시도해서 나오지 않았을까. 바이시클킥, 발리슛 같은 것 말이다. 아마 즐라탄처럼 아크로바틱한 플레이를 많이 해서 그렇게 불러주시는 것 같다. 그런 슛은 연습은 따로 하지 않지만 경기장에서 기회가 되면 해보려고는 한다.

-- 별명에 만족할 것 같다. 이브라히모비치의 열렬한 팬이라고 하던데.

▲ 정말 큰 영광이다.

-- 가장 ‘박라탄스러운’ 골을 꼽는다면.

▲ 경기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발리슛으로 넣은 적도 있고 완벽하게 컨트롤해서 골 넣은 것도 있다. 경기 끝나고 분석하려고 영상을 많이 보는데 그런 골은 보면 혼자서 잘 때렸다고 좋아한다. 동료들도 ‘오∼’라고 해주고(웃음).

-- 작년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WK리그 정규리그 22경기에서 19골을 넣고 득점왕에 올랐다.

▲ 팀에 돌아와서 첫 시즌인 2012년에는 초반에 수비를 담당하다가 후반부터 공격수가 됐고 2013년보다 공격만 하기 시작했다. 감독님이 배려해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2012년 바로 공격수를 했으면 몸 상태가 따라주지 않아 부상 위험이 있었을 것이다. 감독님 덕에 수비를 보면서 게임 체력도 올리고 시야도 넓어졌다.

-- 2013년에 선수 생활의 전기를 마련했지만 그 때문에 역으로 성별 논란이 일어났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지.

▲ 그런 생각은 정말 많이 했다. 따지고 보면 2012년 돌아왔을 때는 10골밖에 넣지 않았으니 아무 말 없던 것 아닌가 생각한다. 작년에 내가 득점왕을 하고 팀은 준우승에 전국체전까지 우승하니까 갑자기 그 얘기가 나왔다. 황당했다. 그렇게 꼬투리를 잡고서는 농담이라고 하니…. 축구하면서 제일 힘든 때였다. 그래도 이젠 신경 쓰지 않는다. 마음 아파해봤자 그때 당사자들은 징계도 안 받았잖느냐. (지난해 11월 6개 WK리그 감독들이 박은선에게 성별 진단을 요구, 연맹이 이를 따르지 않으면 차기 시즌 출전을 거부하겠다고 결의해 논란이 됐다. 올해 2월 인권위는 해당 감독들의 성별진단 요구를 성희롱 행위라고 규정, 대한축구협회와 여자연맹에 해당 감독들의 징계와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러나 7월 여자연맹과 축구협회는 해당 감독들에게 엄중 경고 조처를 내리는 데 그쳤다.)

-- 그런 아픔을 겪었지만 그래도 올해 해외에 진출했다. 러시아리그는 어떤가. 아무래도 몸집이 좀 큰 선수들이 많아서 ‘박라탄’ 모습을 보여주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 깜짝 놀란 게 나보다 덩치 좋은 사람도 많고 키 큰 사람도 정말 많다. 러시아로 나간 것은 내년 월드컵을 앞두고 먼저 유럽 선수들하고 부딪쳐보자고 생각한 게 컸다. 뛰어 보니 정말 도움이 된다. 어느 정도겠구나 하는 감이 좀 온다. 러시아는 예선에서 독일에 밀려서 떨어졌다. 러시아 동료들이 상대국 얘기를 많이 해줘서 정보 수집도 된다.

-- 거의 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뛰는 WK리그와 정말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뛰는 러시아리그 중 어느 쪽이 편한지.

▲ 알고 뛰는 게 편하다. WK리그 선수들은 하도 오래 해봐서 머릿속에 다 입력돼 있다. 여긴 완전히 생판 모르는 채로 뛰니까 어렵다. 물론 상대방도 나를 모르기는 하지만 적응이 좀 필요하다. 올해는 적응한 시기로 볼 수 있다. 날씨 적응이 여전히 고비가 될 것 같다. 10월에 눈보라 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경기하더라(웃음).

-- 올해 대표팀 소집하고서부터 인터뷰를 보면 선수 시절 황혼기에 접어들었다는 얘기를 종종 했다. 은퇴를 염두에 두는 것인지.

▲ 운동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할 것이다. 앞으로 어디에서 운동할지는 정하지 않았다. 내년에 러시아에서 뛰고 잘하면 더 좋은 무대로 나갈 수도 있고, 아니면 한국에서 1∼2년 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해진 것은 없다.

-- 방황 끝에 올해 5월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에서 다시 대표팀에 합류했다. 태극마크를 단 1년을 돌아보며 평가하자면.

▲ 국가대표로서는 정말 만족한다. 정말 재밌었다. 대표팀에서 경기를 뛴 게 9년 만이다. 예전에는 언니들 세대랑 경기를 뛰었는데 올해 소집될 때 들어가 보니 다 후배들이었다. 후배들이 어려워하지 않고 먼저 다가와서 고마웠다. 그래서 나도 같이 장난도 많이 치려고 했다. 운동도 재밌게 했다. 내가 불편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대표팀 감독님도 얘기 많이 해주시고 코치님들도 많이 챙겨주셨다. 팀 전체가 나를 도와줘서 대표팀에는 금방 적응했다.

-- 지금까지 우승과는 유독 연이 없었다. 그래서 내년 캐나다 여자월드컵이 더 기다려질 텐데.

▲ 2004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 때 우승하고 2005년 여자 동아시아연맹컵에서 우승한 게 전부다. 다른 중요한 대회도 많지만 아무래도 축구에서는 월드컵이 최고 아닌가. 내년이면 한국 나이로 서른인데 이왕이면 우승반지를 끼고 싶다.

-- 축구 인생 전성기는 언제였다고 생각하는지.

▲ 전성기는 지나지 않았을까. 그런데 전성기가 온 것 같지가 않다.(웃음) 난 뛰어난 선수는 아니다. 신체 조건이 좋아서 주목받았을 뿐이다. 지금도 볼을 잘 못 차는 게 콤플렉스다. 스피드와 힘은 좋지만 아기자기하게 볼 관리하는 것은 잘하지 못한다. 아직도 지적을 많이 받는다.

-- 그동안 방황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스스로 성숙했다고 보는지.

▲ 아무래도 예전보다는 조금 어른이 된 것 같다. 숙소 이탈 안 한다는 것만이 아니고 전반적으로 생각이 어른스러워졌다.

-- 남은 목표는.

▲ 목표라기보다는 월드컵 대표로 뽑힐지, 안 뽑힐지 모르겠지만 국민이 조금이라도 여자축구에 관심을 더 둬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경기도 중계해줄지 안 해줄지도 모르겠지만 좀 해줬으면 좋겠고….(웃음) 여자축구도 남자축구와 또다른 재미가 있다. 물론 요즘에는 예전보다 여자축구에 더 관심을 가져주시지만 잠깐뿐이다. 결국에는 여자 대표팀이 계속 잘해야 국민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주실 것 같아 우리끼리는 항상 우리가 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힘들게 훈련해도 분위기만큼은 늘 ‘으?으?’다.

--축구하면서 잊을 수 없는 상처도 입고 먼 길을 돌았지만 늘 축구로 돌아왔다. 축구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나.

▲ 그렇다. 솔직히 할 줄 아는 게 축구밖에 없다.(웃음) 어렸을 때 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요즘 어린 선수들은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한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우리 때만 공부보다는 축구에만 집중한 것 같다.

--만약에 축구를 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지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

▲ 그래도 운동하고 있었을 것 같다. 농구를 하고 있으려나.(웃음) 그래도 내 길은 축구다. 잘 선택한 것 같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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