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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개성공단의 기계는 격을 따지지 않는다/최종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열린세상] 개성공단의 기계는 격을 따지지 않는다/최종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입력 2013-06-24 00:00
업데이트 2013-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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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최종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덥다. 벌써 덥다. 전력이 부족하다고 하니, 속 시원하게 에어컨을 틀 수도 없다. 무엇 하나 화끈하게 시원한 게 없다. 이제 여름에 접어들면서 장마도 시작됐다. 날은 지금보다 더 더울 것이며, 습도도 올라 불쾌지수 또한 증가할 것이다. 고온과 습도에 노출된 공장의 기계가 장기간 멈춰 서 있으면, 기계는 녹이 슨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는 말은 그래서 어느 공장이든 가장 중요한 구호인 것이다.

개성공단의 기계가 녹이 슬고 있다. 멈춰진 기계, 근로자가 없는 공장, 봉인된 작업장, 한낮에도 어두운 공단…. 멈춰선 공단은 기업을 망하게 한다. 기업이 망하면 기계는 고철이 된다. 고철이 된 기계는 더 이상 기계가 아니다. 그냥 고철이다. 그러니 기업인의 마음만 타들어 가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올해 여름은 뻔하다. 뜨거운 태양 아래 고철이 된 기계 앞에서 속이 숯검댕으로 변한 기업인들 앞에서, 그리고 이를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불안한 국민 앞에서 우리는 ‘격’ 따위를 따지고 ‘형식’을 논할 것이다. 친하게 지내자면서, 서로를 신뢰해야 한다면서 ‘친구의 조건’을 따지는 유체이탈 화법만 난무할 것이다. 그래서 불안했던 지난봄과 같이 우리와 북한은 비수처럼 날카로운 말 폭탄만 서로의 심장을 향해 던질 것이다. 동원된 군대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훈련을 할 것이고 그 훈련은 외신을 통해 한반도의 불안정이 또 높아졌다고 전달될 것이며, 결국 바캉스를 즐기는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이 태양 아래 읽는 신문 한편의 국제면을 장식할 것이다.

그러나 아는가. 그때쯤 되면 개성공단의 기계는 이미 녹이 슬고, 기업인은 사라질 것이며, 남북관계는 고철이 된다는 것을…. 고철이 된 남북관계 앞에서 화해니 협력이니, 신뢰니 하는 말들은 아무런 위안이 안 된다는 것을….

이렇게 되면 우리는 동맹의 그늘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것이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이상주의자의 꿈으로 치부될 뿐이고, 자주국방의 과제는 고작 헬리콥터를 우리 손으로 만들었다는 선에서 자위해야 할 뿐이며, 독이 한층 올라 방방 뛰는 북한 앞에서 우리는 결국 “한·미 동맹의 굳건한 토대 위에 외교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할 것이다. 그러는 사이, 북한의 핵은 더욱 강력해질 뿐이고, 우리는 북한의 의도를 파악할 길 없어 워싱턴에다, 베이징에다 “북한이 왜 이래요?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물어야만 하는 무기력에 빠질 것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황, 그래서 우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에 더 의존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형식이 내용!”이라고 외쳐만 대는 꼴이 될 것이다.

소장학자로서 나는 우리 대학생들에게 참 미안하다. 20년 전 내가 대학에서 배운 북핵위기, 남북관계, 동북아 국제정치의 내용들을 교수가 된 뒤에도 똑같이 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와 교류보다 안보와 위기가 더 분량이 많은 강의 말이다. 동남아와 유럽의 젊은이들이 국경을 넘어 그들 지역을 무대로 직장을 구하고 삶의 질과 폭을 넓혀가고 있는 사이 우리 젊은이들은 고질적이고 원초적인 국가안보 문제의 구조 속에 갇힌 채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상상력을 상실하고 있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 옆에 살고 있으면서, 세계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베이징이나 상하이에서 직장을 구하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글로벌이라는 개념은 고작 미국으로 유학가거나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것으로 국한이 된 것이다. 평화 없는 곳에 글로벌 상상력은 한여름 밤의 꿈이다.

녹이 슬고 있는 개성공단의 기계는 신뢰 부재의 남북관계 현주소가 아니라, 신뢰를 쌓고자 하는 인내력의 부재를 상징한다. 불안한 한반도의 여름, 결국 찾을 곳이 동맹의 그늘뿐이라면, 이제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우리 젊은이들을 다시 이 좁은 반도에 가두어 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평화를 달성하지 못하는 국가가 부르짖는 ‘글로벌’이라는 구호는 한여름 밤 짜증나는 자동차 경적 소리에 불과하다.

2013-06-24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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