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연극무대에 ‘세 자매’ 올린 러시아 국보급 연출가 레프 도진의 정공법
러시아 연출가 레프 도진
러시아의 국보급 연출가 레프 도진(69)의 연극철학이다. 연극 ‘세 자매’ 공연을 위해 내한한 그는 “온갖 기술 속에서 사는 현대인에게 극장은 자신의 내면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남은 공간”이라면서 “관객을 끌어모으기 위해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치닫는 연극이 많아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그는 1983년 이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말리드라마극장의 예술감독을 맡으면서 극장을 세계적 수준으로 키웠고, 러시아 연극 분야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황금마스크상(3회)과 세계 연극계가 인정하는 유럽연극상을 받았다. 그에게 세계 연극계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것은 이런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연극을 내놓으면서도 뇌리에 박히는 ‘무엇’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 무대에 오른 ‘세 자매’는 그 철학에 충실했다. 안톤 체호프(1860∼1904)가 1900년에 완성한 ‘세 자매’는 러시아의 소도시에 사는 세 자매의 사랑과 배신, 좌절을 그린다. 어릴 때 살던 모스크바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과 현실도피의 갈증을 뱉어내는 세 자매, 무능력한 오빠 안드레이와 불평을 늘어놓는 아내 나타샤, 불행한 결혼에 괴로워하는 베르쉬닌, 세상을 냉소적으로 보는 체부트킨 등 불만으로 가득한 사람들뿐이다. 도진은 “체호프의 연극에 나오는 인물들은 지루하고 나태하며 삶에 대한 의욕이 없다는 편견을 깨고 싶었다”면서 “작품 속 인물 하나하나가 인간은 왜 태어나고, 왜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한다”고 했다. 그래서 무대를 단순화해 인물에 집중했다. 무대 장치는 멀찍이 보이는 2층 집의 벽이 전부다. 1층 현관과 창 4개를 통해 관객은 남의 집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상황이 집 밖에서 이루어진다. 이들에게 집은, 떠나고 싶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 무대에 오른 상트페테르부르크 말리드라마극장의 연극 ‘세 자매’. 러시아 연극연출의 거장 레프 도진은 체호프의 ‘세 자매’에 담긴 열정과 욕망, 고통, 갈등 등 인물들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LG아트센터 제공
LG아트센터 제공
무대 한가운데에 나무판을 놓고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7시간 30분(실제 공연은 5시간 30분)을 지루하지 않게 끌고간 ‘형제자매들’(2006년 공연)이나, 독특한 말투와 코믹한 연기로 큰 호응을 받은 ‘바냐 아저씨’(2010년 공연)에 비한다면 이번 ‘세 자매’는 그 ‘무엇’이 없어 다소 평범해 보인다. 연출은 정공법을 썼고,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조화로 3시간짜리 ‘세 자매’를 끌고 나간다. 러시아어 대사는 자막으로 처리됐다.
최여경 기자 kid@seoul.co.kr
2013-04-12 2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