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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광장] 생강도넛과 빵의 문화다양성/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생강도넛과 빵의 문화다양성/서동철 논설위원

입력 2013-02-16 00:00
업데이트 2013-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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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의 고장인 경북 영주의 풍기는 부석사로 가는 길목이이서 가끔 들르게 된다. 맛으로 내세울 것은 많지 않지만 풍기역에서 멀지 않은 서부냉면만큼은 평양냉면으로 유명했다. 풍기 남쪽에는 평양냉면을 제대로 만드는 집이 없다는 것이 식도락가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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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철 논설위원
서동철 논설위원
냉면밖에 없는 줄 알았던 풍기에서 10여년 전 우연히 돼지갈비가 맛있는 식당을 발견해 한동안 재미를 봤다. ‘돼지’와 ‘품위’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인삼과 간장으로 은근하게 양념한 이 집 돼지갈비에서는 품위 있는 맛이 났다. 하지만 얼마 전 찾으니 이름도 잊은 이 식당은 자취를 감추었고, 대신 ‘인삼갈비’를 앞세운 대형 관광식당이 오가는 길손을 싹쓸이하고 있었다.

그 시절 돼지갈비를 먹고 나면 읍내 뒷골목의 정아분식으로 가는 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1982년 문을 열었다는데, 상호보다는 ‘생강도넛집’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전국 어디에도, 세계 어디에도 없을 생강도넛을 돌아오는 차 안에서 먹는 재미는 쏠쏠했다.

정아분식이 부석사 가는 큰 길가에 매장을 짓고 ‘정도너츠’로 새출발한 것이 2008년이다. 지역 농산물을 가공·판매하며 고용도 늘리는 농업회사법인으로 확대된 것이다. 생강도넛뿐이던 메뉴는 지역특산물을 활용한 인삼도넛, 사과도넛, 고구마도넛, 들깨도넛, 찰흑미도넛, 깨현미도넛 등으로 불어났다. 이제 이 집을 빼놓고는 풍기의 먹거리를 이야기하지 못할 정도로 명물이 됐다.

먹거리가 한 나라의 중요한 문화적 자산으로 떠오른 지 오래다. 그럼에도 최근의 동네빵집 논란에서는 ‘빵집의 경제’만 남고 ‘빵 맛의 문화’는 갈 길을 잃은 것 같아 아쉽다.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의 끝없는 성장이 안고 있는 문제점의 하나가 어느 도시, 어느 골목에서도 똑 같은 빵을 팔고, 전 국민이 같은 맛의 빵을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전 국민이 같은 빵을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은 6·25전쟁 직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식량이 부족했던 당시 전국의 학교에서는 미국산 구호물자로 만든 옥수수빵을 나눠주었다. 어디서나 똑같은 모양, 똑같은 맛이었다.

프랜차이즈 빵집의 가장 큰 문제는 창조적인 제빵종사자를 단순 작업자로 전락시킨다는 데 있다. 배달된 재료를 그저 시간 맞춰 오븐에 넣고 빼는 것이 일의 전부다. 새로운 빵을 밤새워 고민하던 창조력을 박탈한다. 수천, 수만명의 제빵종사자가 경쟁적으로 창조정신을 발휘하는 나라와 이들이 그저 시계를 들고 오븐 앞을 지키는 나라의 미래가 같을 수 없다. 단순작업이 쌓인다고 빵 맛이 좋아질 리도 없으니, 업주들은 제빵사가 조금만 나이가 들어도 임금이 싼 초보자로 대체하려 든다, 자생력이 사라진 제빵사가 어중간한 나이에 빵집 문을 줄지어 나서는 악순환 속에 이들의 고용은 새로운 사회적 과제가 될 것이다.

문화다양성을 옥죄어 잘되는 나라가 있는가. 문화는 낙후되었는데 경제만 발전한 나라란 없다. 산유국이 그렇지만 선진국이라 부르지 않는다.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음에도 문화다양성을 지키는 빵집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서울 삼선교의 나폴레옹과자점은 오늘도 문전성시를 이룬다. 군산 이성당과 목포 코롬방제과는 ‘서해안고속도로 빵 맛 투어’에 나서는 사람이 있을 만큼 여전히 지역의 ‘문화 권력’이다. 대전 성심당, 춘천 대원당, 광주 궁전제과, 대구 최가네케익도 그렇다. 천안 호도과자와 경주 황남빵 역시 영주 생강도넛처럼 특화된 품목으로 빵 맛의 문화다양성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도시를 대표하는 빵집 몇 개로는 부족하다. 거리의 대표 빵집, 골목의 대표 빵집이 줄지어 나와야 한다.

빵은 산업이면서 문화이다. 골목상권 살리기 이상으로 골목문화 살리기가 중요하다. 먹거리는 산업보다 문화로 접근해야 부가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빵의 문화다양성 회복이 절실한 이유이다.

dcsuh@seoul.co.kr

2013-02-16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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