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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가 걸어온 길] 2. 의술로 인술 실천하는 김희수 건양대 총장 (하)

[명사가 걸어온 길] 2. 의술로 인술 실천하는 김희수 건양대 총장 (하)

입력 2013-01-28 00:00
업데이트 2013-0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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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보다 유일, 용기 갖고 도전하면 누구나 되니까

결론은 해보자는 것이었다. “학교 해서 돈 벌겠어. 돈 삼키는 구멍인데. 그렇지만 이치가 그렇잖우. 아,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도 쓴다는데, 어렵더라도 향리에다 틀 잡힌 학교재단 하나 장만해 놓으면 그게 백년대계 아니우. 그때 무슨 배포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시쳇말로 한번 지른 거지. 허허. 평생 그때처럼 밤잠 못 이룬 적이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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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건양대 총장
김희수 건양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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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최근 들어 그때의 결정이 옳았다고 확신하고 있다. 교시를 ‘진리 창조 봉사’로 정했다. 그의 육영 철학은 대한민국에 단 하나뿐인 대학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대학을 세우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돈도 돈이지만 지주들이 땅을 내놓지 않았다. 시가의 40배가 넘게 주고 땅을 매입하기도 했다. “그때가 1989∼1990년 무렵인데, 갑자기 건자재 품귀현상이 빚어졌어. 정부가 일산, 분당 등 신도시를 건설할 땐데 전국의 건자재가 그곳으로 몰린 거야. 다행히 이규성 전 재무부 장관 같은 분들이 큰 도움을 줬지.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1989년 10월에 첫 삽을 뜬 인문학관·경상학관·이공학관·기숙사 등이 잘 지어졌어. 그해 말 10개 학과 400명 모집정원의 건양대 설립인가를 받았지. 그땐 교수래야 고작 25명뿐이었어. 근데 내가 복이 있나봐. 첫해 7.5대1이던 경쟁률이 1994년에는 25.9대1까지 치솟았네. 그해 의대 신설 인가도 받았고.”

그의 설명을 듣다 보니 학교명에 ‘건양’(建陽)을 붙인 까닭이 궁금했다. 십중팔구는 그의 출생지인 양촌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 은사가 한 분 계셨는데, 이 분이 유교나 동양철학, 한학 등에 밝았어. 그분한테 쭉 설명을 드리니 돌아온 답이 ‘건양’이었어요. 알고 보니 그 뜻이 간단치 않아. 그래서 중고등학교를 설립할 때 건양학원이라고 붙였고, 이게 이어져 건양대가 되고, 건양대병원이 된 거지.”

흔히 듣는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의 그 건양이기도 하고, 고종 때인 1896년에 제정한 조선의 연호(年號)이기도 하다. 고종은 당시 왕권의 강대함을 나라 안팎에 알리고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나타내기 위해 왕을 황제라 부르고, 독자적으로 연호를 정해 사용하는 이른바 ‘건원칭제’(建元稱帝)를 단행했다. 건양이라는 연호는 대한제국 출범 후 집권한 친일 김홍집 내각에 의해 제시됐으며, 1896년 1월 1일부터 이 연호를 사용하다 이후 다시 광무(光武)로 바뀌었다.

결과만을 보려는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굴곡 없이 살아왔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모든 자수성가가 그렇듯 그 역시 신산의 고초를 겪었고, 어려울 때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다는 안일의 유혹에 흔들리기도 했다.

“난들 왜 실패한 경험이 없겠소. 당연히 있지. 내가 겪은 실패라는 게 결정적인 정책적 판단 미스가 아니라 실은 돈과 관련된 피해인데, 그런 거 빨리 잊으려고 애써서 헤쳐나왔어요. 골치 아픈 기억 붙잡고 있는다고 뭘 얻는 것도 아니잖우. 어디 그뿐인 줄 아셔. IMF(1997~98년 외환위기)때도 충격이 컸지. 병원 짓느라 땅 파고 골조까지 올려놨는데 이게 빵 터졌어. 그러자 지역 언론에서 ‘건양대 건물 짓다가 부도났다’고 연일 보도하고 그랬어. 허허. 내 평생 수표 거래를 하지 않고 살았는데 부도가 왜 나.”

아쉬운 기억도 있다. “건양대를 처음 설립할 때 경기도 안양에다 터를 닦을 기회가 있었지. 그런데 내 중학교 은사 한 분이 자꾸 ‘인재 양성은 고향에서 해야 한다’고 부추겼어. 그런저런 일로 논산에 터를 닦았는데, 그걸 굳이 실패라고 보진 않지만 그때 안양에 자리를 잡지 못한 아쉬움이 아직도 없지 않아요. 물론 고향에 학교 세워 얻은 보람도 많지.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 같은 건 있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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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세인트 프랜시스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 모습
미국 뉴욕 세인트 프랜시스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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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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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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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총장은 의료계와 육영사업에 몸 담으면서 직간접적으로 고위층과 연을 맺었다. “특별히 그분들과 교분을 가졌던 것은 아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안질 때문에 우리 병원에 다니셨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동창이라 오고가고 했는데, 이분이 나만 보면 정치 하라고 쿡쿡 찌르고 그랬어. 난 절대로 그런 거 못한다고 딱 잘랐지.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잘한 일이야.”

그는 1959년까지 미국 시카고 안과병원에서 수학한 뒤 그해 귀국해 인천기독병원 안과과장을 하다가 1961년부터 제3육군병원 안과과장을 맡았다. 서울 영등포에 김안과를 세워 기지개를 시작한 건 이듬해인 1962년이었다.

“영등포 로터리에서 김안과를 열었는데, 이게 지명도가 낮은 신생 병원이잖아.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 첫날 환자를 열 다섯명 받았는데, 그걸론 안 되거든. 그래서 전단지를 만들어 영등포는 물론이고 수원, 안양까지 쫓아다니며 담벼락에 직접 붙였어. 의사가 할 일이 아니지만 그것도 열정이 있으니 가능한 일 아니었겠소. 대학 설립 때도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였겠어요. 부지 확보에서부터 교사 신축 같은 캠퍼스 조성, 교원 선발, 교수체계 확립 등등 내 손을 안 거친 게 없거든. 모르는 사람들은 날더러 혼자 다 한다고도 말하지만 이런 중요한 일을 남에게 맏기는 게 무책임한 거지. 남들에게 맡기고 왔으면 나도 훨씬 편했을 거야. 하지만 오늘날의 이런 성취는 없었겠지. 처음 개원할 때부터 내 목표는 유일이었고, 최고였어. 그 목표로 가는 과정에 자신을 희생 제의로 삼지 않으면 결코 큰 걸 못 얻지. 최고는 재능과 노력, 시운이 안 따르면 안 돼. 하지만 유일은 달라. 용기를 갖고 과감하게 도전하면 누구나 한 분야에서 유일한 존재가 될 수 있거든. 그러니 도전하라는 거지. 쉬운 길을 가면 ‘원 오브 뎀’(One of them·여러 사람 중 한 사람)은 될 수 있지만 ‘온리 미’(Only me·오직 나)는 될 수 없어. 내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후학들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 하면 되니까 해보라고.”

그는 지금도 초심을 되새긴다고 말했다. “초심이라는 게 내 몸 바쳐서 젊은 인재들 기르는 요람 하나 번듯하게 만들겠다는 거였는데, 요즘도 운동화 신고 학교 여기저기 누비며 쓰레기 줍는 내 심정을 학생이나 직원들이 알까 몰라. 그 일이 옳다고 한들 내가 솔선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 정답은 스스로 하라는 거지. 성철 스님이 그러셨거든. 아는 것이 천하를 덮을 정도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터럭만 한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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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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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보건소장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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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총장은 문태준 시인의 시 ‘수평’의 한 대목을 소개했다.

‘한 마리 잠자리가 만들어놓은 이 수평 앞에 내가 세워 놓았던 수많은 좌우의 병풍들이 쓰러진다’

“이 시를 읽으면서 무릎을 탁 쳤어. 한국인들은 수직적 사고에 특히 길들여져 있거든. 성적, 연공서열 등이 죄 그렇잖아. 그런데 이게 부작용이 커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경쟁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거든. 이걸 수평적 사고 체계로 바꿔야 해. 그래야 창의력도 생기고, 경쟁도 완화할 수 있지. 이런 수평적 사고에다 앱스토어라는 콘텐츠 유통 플랫폼만 더하면 얼마든지 세상을 남보다 앞서 갈 수 있어. 난 그렇게 확신해요.”

세속적 시각으로 보면 누가 봐도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둔 그다. 스스로 ‘성공’을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 사회는 단순히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로 성패를 가르는데, 이거야말로 당황스러운 성공관이야. 병원을 세워 제법 큰 돈을 벌어봤던 난 그렇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 내 경우 돈보다 환자들이 병을 고쳐 기뻐할 때가 훨씬 재미있었어.”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프랑스의 퐁피두 전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지. 중산층이란 외국어 하나쯤 자유롭게 구사해 생활의 폭이 넓고, 스포츠 한 가지는 능숙하게 즐기며, 악기를 다룰 줄 알고, 자기만의 특별요리로 손님을 초대해 대접할 수 있고, 사회정의가 훼손될 때 앞에 나서 바로잡을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격조 있는 중산층론이지. 그런데 난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고 싶어. 바로 ‘나눔’이야. 남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이거든.”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삶의 성공 여부는 남의 시각으로 판단할 수 없어. 스스로에게 ‘문화를 즐기며 사는가, 정직한 삶을 살아왔는가, 정의롭게 살아왔는가, 내 것을 나누고 있는가’라고 물어서 스스로 부끄럽지 않다면 그보다 더 성공적인 삶이 어디 있겠어요.”

대학에서 김 총장의 질책을 한번도 듣지 않은 사람은 찾기 어렵다. 일부에서는 교권 침해라며 뒷담화를 하기도 한다. 그는 모든 교원들이 자신의 철학을 존중하고 따라주기를 바라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도 그거 알지. 내 임기가 내후년 1월까진데, 실은 좀 쉬면서 병원 뒤편에 학교법인 건물 하나 세울까 했어. 그런데 그걸 서두를 이유가 없어. 건강 좋거든. 검사를 해보니 뇌는 아직도 40대야. 다들 치매 걱정하는데, 이것도 열심히 움직이며 사는 덕인가봐.”

지금 그의 가슴은 오로지 젊은 학생들, 그리고 열정을 갖고 이들을 가르치는 교수들로 가득 차있다. 그가 학생들에게 전하는 첫 메시지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나는 왜 안 되지 하는 생각에 빠지는 건 좋지 않아요. 자신을 가져야지. 아, 젊은 청년들이 그거 말고 다른 자산이 있나. 가만 보니 우리 학생들 중 상당수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못 갔다는 열등감을 갖고 있어. 이게 말하지면 덫이야. 그걸 없애야겠다 싶어 무진 애를 썼지.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요. 기계공학과 학생들 토익 점수가 900점을 넘어. 결코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자신감이 없을 뿐이지.”

김 총장은 한사코 학생들을 껴안는다. 학생들이 죄다 손자 같고 손녀 같다며 너털웃음을 웃는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애들 칭찬해요. 기 죽이면 애들 삶이 망가지잖우. 교수들에게도 칭찬 많이 하라고 주문해. 걔들 지금까지 칭찬에 주린 애들이거든. 그렇게 하니 애들이 달라져. 내가, 아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겠소. 애들 좋은 품성 갖게 하고, 공부 열심히 시켜 일하고 싶은 곳에 취업시키는 게 중요하거든. 그렇게 해서 어디에서든 하고 싶은 일 하면 돼. 건양대 나온 젊은이들 성실하게 일 잘한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그걸로 족해요. 그거 말고 내가 뭘 더 욕심 내겠소.”

문득 김 총장을 한사코 ‘과욕’이나 ‘노탐’과 묶어 보려 했던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아직도 청춘이라는 그의 말이 자리 보전을 위해 하는 ‘입에 발린 말’이 아님도 알겠다. 김희수. 그는 과거에 비춰 미래를 빚으려는, 이 시대의 몇 안 되는 가부장적 지사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먹고살기에 바빠서, 아니면 부나 권력을 탐하느라 지향 없이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따로 눈길 한번 주지 못하는 이 시대가 큰 빚을 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심재억 전문기자 jeshim@seoul.co.kr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2013-01-2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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