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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광장] 자영업, 살아남는 자가 강자/임태순 논설위원

[서울광장] 자영업, 살아남는 자가 강자/임태순 논설위원

입력 2012-09-29 00:00
업데이트 2012-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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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고향에 가 벌초를 끝낸 뒤 칼국수를 잘한다는 집을 찾아 늦은 점심을 때웠다. 콩국물에 호박과 소고기를 듬성듬성 썰어놓은 칼국수는 소문 그대로였다. 70대로 보이는 할머니는 150원 하던 칼국수가 6000원이 됐다며 장사한 지 40년이라고 했다. 광산이 폐광돼 장사가 예전 같지 않지만 자식들도 다 커 지내는 데 어려움은 없다고 했다. 식당을 나서다 어린 시절부터 알던 동네 형님과 마주쳤다. 평생 간판업에 종사해 온 그는 내일모레면 일흔인데도 가게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건강해 보기 좋다고 하자 일거리가 없으면 낚시도 다니고 산에도 오른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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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순 논설위원
임태순 논설위원
두 사람을 보면서 고령화와 고용불안의 시대에 자영업의 위력, 매력을 새삼 느끼게 된다. 우선 70의 나이에 소일거리가 있고 출근할 공간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은퇴한 직장인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가게에서 일하면서 손님들과 만나니 노인의 고독, 소외는 먼 나라 얘기다. 정년이 없으니 일터는 평생직장이다. 또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어 변변치 않은 자식의 취업걱정도 덜 수 있다. 기업에 다니다 퇴사한 선배도 이런 생각에 공감을 표했다. 그는 헬스장에서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나는데 자영업자들이 전직 기업체 임원들보다 심리적으로 훨씬 안정돼 있고 여유가 있어 보인다고 했다. 전직 임원들은 재산이 많은데도 ‘직’(職·자리나 직위)을 떠나서인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지만 평생 ‘업’(業·일)에 매달려 온 자영업자들에게선 어떤 난관이 닥쳐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풍상을 거치면서 자기만의 세상 사는 비법을 터득해 온 ‘생활의 달인’이니만큼 뒷심이 있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자영업이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자영업으로 안착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오랜 세월을 버티고 견뎌 내는 내공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 같다. 최근 마포상인들이 펴낸 책 ‘강상대고 활’을 보면 도화동, 용강동 일대에 뿌리내린 상인들의 구력은 20년에서 30~40년을 훌쩍 뛰어넘는다. 이들은 긴긴 시간 숱한 시련과 좌절을 이겨내면서 오늘날까지 가게문을 열고 있다. 1966년부터 고깃집을 했다는 서영기(81) 할머니는 “밑천 없이 시작해 손님이 왔다 가면 그 돈으로 다시 고기를 사와 팔았다.”며 “하루 울고 하루 장사하다 보니 누가 먹어도 맛있다는 날이 오더라.”고 했다. 할머니는 또 “맛이 하루아침에 나오는 게 아니야. 솜씨가 있어도 맛이 익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돈 갖고 뚝닥뚝닥할 생각 말고 꾸준히 제맛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불이 나 망했다가 손님들의 격려로 재기했다는 이희옥(70) 할머니도 “장사 잘되는 것만 보지 말고 어른들이 어떻게 장사했는지 그걸 먼저 생각해야 한다.”며 “그래야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작가 말콤 글래드웰이 말한 1만 시간의 법칙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는 책 ‘아웃라이어’에서 어느 분야든 성공하려면 하루 3시간씩 하루도 쉬지 않고 10년간 매달려야 한다고 했다.

베이비부머들이 직장을 그만두면서 너도 나도 자영업에 뛰어들고 있으나 결과는 좋지 않다. 경기개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경기도에서 창업했다 폐업한 비율은 78.4%에 이르며 특히 음식업은 10곳 중 9곳이 문을 닫을 정도로 부침이 심했다. 자영업이 베이비부머의 무덤이 되고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또 준비기간이 1년도 안 된다는 비율이 50대는 86.8%, 60대는 95.4%나 돼 급한 마음에 준비 없이 뛰어들고 있었다. 밑천 없이 시작한 서영기 할머니처럼 가게를 조그만하게 시작하고, 어른들이 어떻게 했는지 보라는 이희옥 할머니처럼 댓바람에 그럴듯한 가게부터 열지 말고 남의 밑에 들어가서 경험을 쌓아야 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고 했다. 추석 차례를 지내고 자식·손자를 뒤로하고 가게로 나갈 이 땅의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들이 새삼 존경스럽다.

stslim@seoul.co.kr

2012-09-29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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