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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 그의 꿈] 미술관과 바람 난 작가 할매들의 소꿉장난

[그의 삶 그의 꿈] 미술관과 바람 난 작가 할매들의 소꿉장난

입력 2012-02-05 00:00
업데이트 2012-02-0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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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미술관 김광옥·임혜숙 부부의 ‘꿈’

구불구불 시골길이 환해졌다. 플래카드에는 ‘할매들의 소꿉장난 Ⅱ’라고 쓰여 있었다. 소꿉장난 하는 할매들? 궁금했다.

전남 함평군 해보면 산내리로 들어서는 길이다. ‘산 안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산내리는 주말이면 할머니들과 손자들이 같은 곳에서 ‘노는’ 특별한 마을이다. 젊음은 고단했던 삶으로 다 보내고, 외로움에 생기마저 잃은 시골 할매들은 이 마을에 없다. 대신 느지막이 미술관과 바람이 난, 작가 할매들만 있다.









봉숭아 연정

쓸쓸했던 산골 마을이 바뀐 것은 6년 전 마을에 ‘잠월 미술관’이 들어서면서 부터. 인근 광주광역시에서 중학교 미술교사를 하던 김광옥(53·광주 월곡중 교사)·임혜숙(50·광주 신창중 교사) 부부가 미술관을 짓고, 아예 거처도 옮겨왔다. 그리고 이제는 마을의 가장 젊은 부부로, 할매들의 친구로, 미술 선생님으로 새로운 삶과 꿈을 ‘산골 도화지’에 할매들과 함께 그려 나가고 있다.

모처럼 겨울 볕이 든 미술관 마당 정자에 앉은 부부. 서로 손가락을 만지작거린다. “어머, 아직 다 안 지워졌네.” 뭘 하나? 다가가 봤더니 새끼손가락 손톱 끝에 분홍색 봉숭아 물이 아직 선명하다. 50이 넘은 나이 그것도 학교 선생님. “용기가 참 부럽다” 했더니, 이들 부부, 더욱 서로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환하게 웃어넘긴다.

25년 전 대학 때 선배와 후배로 만난 부부는 2007년 편한 도시생활을 마다하고 산내리로 왔다. 함평군 산내리가 고향도 아니고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정년퇴임하면 문화 소외지역인 농촌에서 새로운 일을 해 보겠다’고 생각했던 일이, 김 관장의 친구였던 이석형 전 함평군수의 소개로 예고 없이 조금 앞당겨진 것뿐이라고 했다.

그렇게 미술관을 세우고, 마당 한쪽에 살림집을 지었다. 텃밭에는 배추, 무가 자란다. 키우던 개는 강아지를 여덟 마리나 낳아 산골 미술관에 식구가 더 늘었다. 미술관 건너편 마을 창고에 그려진 벽화는 대학생인 부부의 큰아들과 친구들이 그렸다. 벽화 하나로 마을에 생기가 돌았다.









할매들과 함께 소꿉장난

산내리 할매들은 유명해졌다. 주민 21명에 평균 나이가 75세지만, 할머니들에게 인생의 재미난 맛은 이제부터다. 할매들이 ‘느닷없이 생긴’ 미술관을 마실 다니듯 드나들면서다.

처음에는 김 관장 부부의 “놀러 오세요”라는 말에 ‘넘사스러와서(남 보기 창피해서) 못∼혀’라고 버텨봤지만 얼마 못 가 무너졌다. 일어나면 동네 한 바퀴 돌고, 어른들 보면 인사하며 동네사람이 되어가는 김 관장을 모른 척 하기가 점점 힘들어졌기 때문. 김 관장은 “마을 어르신이 ‘맨날 송장만 들어오던 마을에 처음으로 젊은 사람들이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이제는 함께 막걸리도 마시고 놀러도 다니는 사이가 됐습니다”라고 했다.

‘할매들의 소꿉장난’ 전시가 열리고 있는 미술관에는 김 관장 부부의 꿈이 할매들의 손을 빌려 놓여 있다. 멋대로 도자기에 그린 그림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웃음이 나온다. ‘김 관장 누에는 발이 몇 개인지 아는가’하고 물은 할머니에게 ‘잘 모르겠는데요’ 했더니 접시 위에 발이 여럿 달린 누에가 화려하게 그려졌다. 제멋대로 만든 식기들에도 할머니들의 마음이 묻어난다. 잘 익은 감이며 유자, 모과 등 농산물들도 전시되고 있다. “이것 역시 할머니들이 1년 동안 손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게 김 관장의 설명이었다.

“요즘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늘 현관에 김장김치가 담긴 그릇이 놓여 있습니다. 누가 가져다 둔 건지는 모르지만 할머니들의 마음이라는 것은 잘 안다”는 부부는, “규모나 전시작품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초라한 미술관일지 몰라도 할머니들의 삶과, 소녀적인 감성을 전시하는 곳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낙엽 진 나무처럼 쓸쓸했던 할머니들의 삶에 김 관장 부부가 ‘봄’을 끌고 온 것이다.







산골 미술관의 꿈

미술관은 마을의 자랑이다. 주말이면 할머니들을 찾아 온 자식들과 손자들이 빠지지 않고 들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날도 미술관은 멀리서 찾아왔다는 할머니들의 손자들 차지 였다. 아이들은 공방에서 마음껏 흙을 가지고 놀다가 싫증이 나면 마당으로 나갔다. 주중에는 할머니들이, 주말에는 손자들이 같은 것을 가지고 노는 셈이다. 얼마 전에는 KBS 인간극장에 부부의 이야기가 소개되면서 뜻하지 않은 인기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잠월 미술관은 이미 함평군에서는 ‘슈퍼 미술관’이다. 개관 기념으로 할머니들의 얼굴과 삶을 고스란히 담아낸 <우리 마을 산내리 전(展)>은 대박의 시작이었다. 추석 연휴 기간과 맞물린 전시에는 1,000여 명이 찾았다. 명절 때 고향을 찾은 사람들은 모두 거쳐갔다.

이후에도 할머니들의 삶과 인생을 품은 전시를 이어가고 있는 미술관은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이는 날이 부쩍 많아졌다. 주변 평가도 좋아졌다. 이제는 인근 마을에서도 ‘미술관이 왜 산내리에만 있느냐’는 푸념도 한다.

그럴수록 김 관장 부부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혜택을 주변 마을에도 드리고 싶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다. 남들은 ‘부부교사’라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하는 일인 줄 알지만, 가계부는 늘 적자다. 퇴직금을 담보로 건물을 지었고, 월급의 대부분은 운영비로 나간다. ‘영화 구경’을 못하는 할머니들을 위해 미술관에 시청각실을 만들어 영화를 상영하는 계획도 비용 문제로 진척이 없다.

위기지만 부부의 꿈은 꺾이지 않고 있다. 부부는 “경제적으로는 어렵지만 시골 곳곳에도 주민 밀착형 시골 미술관이 생겨야 한다는 것을 산내리가 보여주고 있다. 지자체의 관심이 아쉽기는 하지만 지역 주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미술관을 만들겠다”고 했다.

오히려 부부의 꿈은 미술관을 넘어 다른 곳으로도 향하고 있었다. “모든 우리나라 농촌이 그렇듯이 할머니들도 언젠가는 돌아가실 테고 산내리가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두렵기도 하지만, 젊은 작가들이 모여 들면 할머니들의 꿈이 이어질 겁니다. 미술관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미술관을 나서는 길. 할머니들의 주름을 닮은 꾸불꾸불 시골길, 더 이상 싫지 않다. 부부의 꿈과 삶에, 길도 환해졌다.

글·사진_ 강현석 《전남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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