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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줏대감 나무 이야기] 탱자나무

[터줏대감 나무 이야기] 탱자나무

입력 2011-12-25 00:00
업데이트 2011-12-25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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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뒷모습 지켜보는 시골집 할머니 같은

포항 내연산 기슭에 있는, 예쁘장한 여자아이 이름 같은 ‘보경사’는 신라 진평왕 때 지명법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동해 명당에 묻고 절을 세우면 외적의 침입을 막고 삼국통일을 할 수 있다는 예언과 함께 지명법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묻고 세운 절이라 하여 보경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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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일상의 가을 모습을 위해 온 힘 다해 400년 풍상을 뚫다 햇빛에 눈부셔 주름진 눈 감은 어릴 적 시골집 할머니처럼 떠나는 우리 뒷모습 지켜보다 역사가 오래된 절집 가는 길. 양쪽으로 아름드리 고목들이 함께 걷는다. 세월 속을 통과해 온 아름다운 몸이 짓는 곡진한 말을 듣는 무용(舞踊), 느티나무, 굴참나무, 소나무들의 춤사위 아래로 걸어가면 정중동(靜中動)의 깊은 울림이 느껴진다. 이런 나무들은 오래 살아 고목으로 자란 모습을 다른 곳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절집 안에는 특별한 고목이 있다. 바로 400년 된 탱자나무다. 너도나도 잘난 데 없는 시골친구들처럼 그다지 대접받는 나무는 아니지만 가을이면 노랗게 익은 탱자를 조랑조랑 달고 있는 탱자나무는 정다운 나무다. 어릴 적, 집이나 과수원 생울타리로 촘촘히 이어 자라던 탱자나무를 기억한다. 그런데 이곳 보경사에는 독립되어 정원수로 보호받으며 자란 탱자나무가 고목이 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절 안으로 들어서자 적광전 앞 큰 나무, 반송이 먼저 눈을 맞춘다. 탱자나무는 종무소 옆 담장 가에 혼자 한적하게 서 있다. 본래는 두 그루가 마주보며 서 있었다고 하는데 몇 년 전 매미태풍에 한 나무는 쓰러지고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아 있다. 이 나무도 그때 큰 가지가 부러져 고생을 하다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있다. 나무는 수령에 비해 그다지 키가 크지는 않다. 다만 고집 센 힘줄로만 뭉쳐진 발목처럼, 골이 패여 단단해 보이는 밑둥치 줄기가 장하게 걸어온 시간을 말해준다. 또 한 고비 태풍을 헤치고 나온 나무는 묵묵히 제 모습대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 변함없는 가을날을 이루었다. 나무는 여전히 억센 가시들로 숨은 방을 만들고 그 안에 황금빛 새알같은 탱자를 한가득 품었다. 가을이 오면 당연히 보던 탱자나무의 모습이다. 그러나 늘 똑같아 보이는 일상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이제쯤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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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나무는 이 일상적인 가을 모습을 위해 해마다 온 힘을 다해 400년의 풍상을 뚫어온 것이다. 오랜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도 그다지 큰 몸을 지니지 못한 이 탱자나무를 보며 우리는 알게 된다. 그날이 그날 같은 우리들의 소박한 하루하루는, 의식도 못하는 그 평온한 숨을 지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온몸으로 떠받치고 있는 큰 하루인지를. 탱자나무는 햇빛이 환한 곳에서 잘 자랐다. 호랑나비와 참새들이 햇빛을 털며 탱자나무 울타리를 드나드는 모습은 밝고 신기했다. 살짝 손을 집어넣어도 여지없이 날카롭게 찔리는 가시 속인데도 참새와 호랑나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드랍게만 들락거렸다. 봄이면 하얗게 달빛처럼 피는 꽃이 가시를 뒤덮고 향기롭게 피어나는 모습은 살결 뽀얀 옆집 순이처럼 예뻤다. 그리고 가을, 금빛으로 여물어 보들보들 솜털이 난 탱자를 보면 아이들은 시어서 먹지도 못하는 걸 번번이 가시에 찔리면서도 땄다. 손바닥 안에 굴리다가 코끝에 대고 냄새 맡고 하며 놀다가 방구석에서 탱자는 말라가곤 했다. 고동을 따와서 삶아먹을 때 탱자나무 가시는 고동 속을 빼먹는 데 아주 잘 쓰였다.‘유자는 얽어도 손님상에 오르고 탱자는 곱디고와도 똥밭에 구른다’고, 그렇게 흔하게 보던 탱자나무 울타리가 새마을운동에 시멘트 담으로 변하면서 없어져 요즘은 보기가 어렵다.

보경사를 빠져나오며 보니 종무소 담장 위로 서 있는 탱자나무의 아담하고 연한 자태가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나게 한다. 방학 때면 시골 할머니 집에 가곤 했다. 가시와 햇빛의 한 생을 통과한 몸은 쪼그라들어 어린 내 키만 하던 할머니는 어두워진 눈 대신 꺼칠한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더듬어 만지곤 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면 서운해 담 옆에 서서 우리가 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던 할머니 모습은 메아리처럼 가는 길에 울렸다. 이제는 알겠다. 그 여린 메아리들이 힘 세다는 것을. 그것들이 모여 가시 길 안에도 참새가 다치지 않는 보드란 길을 열어 주고 작은 일상을 지키는 것을. 보경사 탱자나무도 햇빛에 눈이 부셔 주름진 작은 눈을 감은 듯 찌푸리고 서서 우리가 가는 뒷모습을 그저 지켜보며 메아리를 던지고 있다.

글·사진_ 이선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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