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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 그의 꿈] 다례는 지나침 없는 자연스러움이다

[그의 삶 그의 꿈] 다례는 지나침 없는 자연스러움이다

입력 2011-12-25 00:00
업데이트 2011-12-25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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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원재단 김의정 이사장

11월 26일 토요일, 서울중앙박물관 강당에서는 ‘국제 청소년 차 문화 대전’이 열리고 있었다. 유치원생부터 대학생까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가 생활다례를 보이고, 그중 우수하게 다례를 마친 학생들에게 상이 주어졌다.

경연을 주최하는 명원문화재단은 한국의 차 문화를 보급하고 정립하는 다도의 종가로, 국가에서 인정하는 다례 전문 기관이다. 경연이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명원재단 이사장이자, 궁중다례 보유자인 김의정 이사장을 만났다. 오랫동안 차와 함께해 온 다인답게,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모습에서 기품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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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다도의 선구자, 명원 김미희 선생

명원재단은 김의정 이사장의 어머니인 명원 김미희 선생의 의지를 이어가고자 설립되었다. 명원 선생이 차에 뜻을 가지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 학생이었던 명원 선생은 학교에서 일본식 예절과 다도를 배우면서 어린 마음에도, 이게 아닌데 싶었다고 한다.

그렇게 싹튼 민족의식이 차로 가시화된 것은 전쟁 이후였다. 명원 선생의 남편이자 쌍용그룹 창업주인 성곡 선생이, 전쟁의 후유증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도 올림픽 정신이 필요하다고 정부를 설득해, 한국 선수들이 헬싱키 올림픽에 참가했던 것이다. 이때 명원 선생도 함께 유럽에 가게 되었다.

처음 유럽을 여행하게 된 명원 선생에게 그들의 식음 문화는 충격적이었다. 특히 덴마크 왕실 만찬에 초대를 받았을 때는 서빙하는 사람들의 일사분란하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때문에 그들이 내려놓는 포크 소리, 카트 끄는 소리조차 음악처럼 들릴 정도였다. 선진 문화란 경제만으로, 스포츠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당시에는 한국행 직항 비행기가 없던 탓에 일본을 경유해야 했는데, 그때 명원 선생은 한국의 차 문화를 복원해야 하는 당위성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한옥에 정자가 있듯이 일본에 집집마다 차실이 있는 것도 놀라웠는데, 그곳에서 초대를 받아 간 일본 차 행사에서 어느 일본인이 당신들에게도 차 문화가 있느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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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례(茶禮), 즉 차의 예식을 생활예절의 기본으로 하는 한국 차 문화의 역사는 2천여 년 전 가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외침, 일제강점기와 전쟁 등 굴곡 많은 세월을 거치는 동안 그 모든 것이 쇠퇴했으니 명원 선생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고 한국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부터 전통 차 문화를 복원하려는 명원 선생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차는 알아도 예절은 모르고, 차를 마셔도 다구가 없어 일본식 찻잔으로 마시는 상황이었다. 다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조차 일본식 다례법을 따르던 시절이었다.

명원 선생은 사비를 털어 잔을 구울 가마를 짓고, 옛 왕실의 상궁들을 찾아가 전통 다례법을 배웠다. 일본을 수십 번 오가며 임진왜란 때 빼앗긴 다구를 찾아다니고, 다례에 필요한 전통 의상, 꽃꽂이, 음식 등을 연구해 나감으로써 우리 것에 섞인 왜색을 지워나가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명원 선생을 가장 괴롭힌 것은 열악한 환경이 아니었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예절이며 문화가 다 무슨 소용이냐는 시선이 명원 선생을 가장 외롭게 했다는 것이다.

1979년, 우여곡절 끝에 명원 선생은 한국 최초로 ‘차 문화 학술 대회’를 개최했다. 생활다례라는 용어가 없던 시기에 생활다례를 선보이고, 힘겹게 고증해낸 한국 고유의 전통 다례를 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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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만 우리는 게 아니라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다례

명원 선생의 둘째딸인 김의정 이사장은 어릴 때 몸이 약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돌기보다는 어머니 곁에서 어머니가 다례를 복원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아왔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어머니의 뜻을 이어가고자 한 건 아니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나이였지만, 명원 선생은 자신만의 어머니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사람이었고 집은 늘 다례와 관련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머니를 빼앗긴 서운함은 어머니가 하는 일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그런 그가 명원재단을 설립하고 어머니의 의지를 이어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명원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의 일이었다. 명원 선생이 없자, 명원 선생의 어깨 너머로 단시간 차를 배웠거나, 왜색이 섞인 차 문화를 우리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제각기 원조를 주장했던 것이다.

어머니 옆에서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차를 배운 그는 비로소 우리 문화를 제대로 전하는 일의 의미를 깨달았다. 다례의 중요성은 단순히 차를 우리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었다. 진짜는 사라지고 모두가 원조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15여 년을 고생도 많이 했다. 하지만 그는 진실은 사라지는 게 아니지 않느냐며, 어머니는 복원하는 단계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지만 자신은 어머니가 해놓은 것을 이어가기만 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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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례는 자연스러워야 하는 것, 지나치지 않아야 하는 것

지금은 명원 선생이 다례 복원에 애쓰던 당시와 많이 다르다. 먹고 사는 일에만 바빠 다른 문제에 소홀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의 습득이 쉬워지고 지적 수준 또한 높아진 시대에, 그러나 우리는 인성교육이 더욱 중요함을 말한다.

김의정 이사장은 예절을 모르고서는 차도 없다고 말한다. 차를 마실 때에는 한복의 옷차림, 다례를 위한 도구, 정갈한 몸가짐 등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 차는 무엇보다 정신을 강조하며, 다례에는 예절의 시작과 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의정 이사장이 말하는 다례는 무엇보다 자연스러워야 하고,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은 예절과 안목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이다. 지나치지 않다는 것은 절제와 균형의 문제다. 차를 우릴 때는 물이 너무 세도 안 되고 많아도 안 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나침 없이 중도와 조화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차의 정신을 인간관계에 대입해 보면, 서로 간에 예를 지키는 것이요, 남을 위하고 헤아리면서 화합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곧 도덕성이기도 하다. 명원 선생은 한국 다인들이 갖춰야 할 정신으로 청정(淸淨), 검덕(儉德), 중화(中和), 예경(禮敬)을 꼽았다. 이는 비단 다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태도이기도 하다. 옛 사람들이 차를 통해 생활 예절을 배운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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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정 이사장이 스스로 숙제로 삼는 일도 여기에 있다. 그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다례의 의미를 알고, 초등학교 때부터 조기 교육을 시키기 바란다. 아이들의 정서 함양에 큰 도움이 되고 안목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가 말했듯이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자국의 문화를 지키고 계승하는 데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제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로워도 문화와 정신이 없는 나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뿐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명원 선생과 김의정 이사장이 경계하는 것도 이것일 것이다.

글_ 하재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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