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이 만난사람] 노숙인들과 발레 ‘호두까기 인형’ 무대 올리는 제임스 전

입력 : ㅣ 수정 : 2011-11-1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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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로 얻은 자신감… 노숙인들과 나눌 수 있어 행복하죠”
노숙인A:발레가 뭐죠?

노숙인B: (질문같지 않다는 듯이)백조의 호수처럼 아름답게 춤추는 것.

노숙인A:(잠시 고민하다가)그랑 플리에(Grand Plie)는?

노숙인B:무릎과 발이 아웃턴.

노숙인A:그러면 그랑 주테(Grand Jete)는?

노숙인B: 공중으로 날아올라 두 다리를 일자로 벌리는 것.

노숙인A:앙바(En Bas)는?

노숙인B:어깨를 내린 후 두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린다.

노숙인A:(더 질문할 것이 없다는 표정으로)에이, 얼른 신발 신고 호두까기나 합시다.
지난 8일 경기 과천에 있는 서울발레시어터 연습실에서 만난 제임스 전이 올 연말 노숙인과의 발레 공연을 앞두고 연습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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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일 경기 과천에 있는 서울발레시어터 연습실에서 만난 제임스 전이 올 연말 노숙인과의 발레 공연을 앞두고 연습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차이콥스키가 작곡했다. 소녀 클라라가 크리스마스에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로 받는다. 그 인형이 꿈 속에서 쥐의 대군을 퇴치하고 아름다운 왕자로 변한다. 그리고 클라라를 과자의 나라로 데리고 간다는 환상적인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는 1948년 서울발레단에 의해 초연됐다. 발레 ‘호두까기 인형’은 그렇게 우리들 가슴속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새달 29~31일 고양 어울림누리극장서 선보여

그 진행형 속에 노숙인들이 등장한다. 진짜? 그렇게 물어볼 사람들이 많겠다. 맞다. 노숙인들이 직접 출연하는 발레무대가 오는 12월 29~31일 경기 고양 어울림누리극장에서 펼쳐진다. 여기에는 다리를 절뚝거리는 노숙인도 출연한다. 파티에 참석하는 첫 장면이기에 어색함이 전혀 없다. 이들은 요즘 매주 일요일 과천에 있는 서울발레시어터(단장 김인희) 연습실에서 ‘호두까기 인형’ 춤을 추느라 비지땀을 흘린다. 웬만한 발레용어도 익숙해졌다. 기존의 단원들과 호흡도 척척 맞는다.

‘호두까기 인형’뿐만 아니다. 지난 10월 발레 ‘솔리스트’(Soloist)에도 등장해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렇듯 직접 출연은 물론이고 올해만 발레공연을 10여 차례 관람하면서 예술적 감각, 새로운 삶에 대한 자신감을 찾아가고 있다.

이들은 지난 4월부터 열심히 발레 교육을 받고 있다. 주로 노숙인 자활잡지 ‘빅이슈 코리아’를 파는 이른바 ‘빅판’ 10여명이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길거리에서 잡지를 팔고 일요일에는 발레 연습실에서 만나 서로의 아픔과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는 동안 두 명은 연세대 병원 등에서 새로운 직장을 찾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됐을까. 노숙인들을 지도하는 사람은 서울발레시어터의 상임 안무가인 제임스 전(52)이다. 그는 노숙인들과 만나 진솔한 대화를 하다가 영감을 얻어 지난 10월 ‘솔리스트’안무를 하게 됐다. 좋은 업을 쌓아서 그런지 최근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되는 복도 받았다.

지난 8일 서울발레시어터 연습실에서 제임스 전을 만났다. 김인희 단장과 먼저 인사를 했더니 옆에 있는 제임스 전을 향해 ‘같이 사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제임스 전은 부끄러운 듯 웃는다. 나이 50이 넘었지만 웃음이 천진했다. 어떻게 살아가는지 짐작이 갔다.

그는 시간 날 때마다 노숙인 자활잡지 ‘빅판’ 파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직접 길거리에 나서기도 한다. 이날도 제임스 전은 그러기에 앞서 잠시 시간을 냈다. 먼저 연말 공연, 그러니까 ‘호두까기 인형’ 버전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호두까기 인형은 모던과 클래식이 있는데 이번 공연은 클래식 스타일입니다. 2007년에 안무했던 적이 있지요. 그때와 다른 것은 노숙인들이 무대에 올라선다는 것입니다.”

정식 발레단원이 아닌데 노숙인을 출연시킨다고 하니 문득 궁금증이 생긴다. 그래서 혹시 작품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맨 앞부분, 그러니까 제1막 1장에 등장합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의 분위기죠.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 크리스마스 이브 파티로 들떠 있습니다. 한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바쁘게 걷는 어린아이들과 부모들이 행복으로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파티장으로 들어옵니다. 그때 노숙인들이 등장하는 것이지요.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파티에는 누구나 참석할 수 있잖아요.”

발레 무대에 오르는 노숙인 김모씨는 관절이 좋지 않아 똑바로 서기가 쉽지 않다. 불편한 몸이지만 균형 감각을 찾기 위해 발레를 시작했단다. 파티 장소에서 술에 취한 귀족역할을 맡았다. 조금은 휘청거리고 바닥에 쓰러지기도 하는 역할이라 별 무리가 없다. 김씨는 1년째 연세대 앞에서 잡지 ‘빅판’을 팔고 있다. 한때 번듯한 PC방 주인이었다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처자식과 이별한 뒤 노숙인이 됐다. 또 다른 노숙인 구모씨는 종각역에서 ‘빅판’을 팔고 있지만 올 연말 ‘호두까기 인형’에 출연하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이들은 지난 10월 발레 솔리스트에 출연했을 때 난생 처음 박수를 받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제임스 전은 이들을 만날 때마다 친구처럼 대한다. 발레를 배우는 노숙인들은 30대에서 50대 남성들이다. 이들 중 열의를 갖고 고정적으로 발레를 배우러 오는 사람은 8명이다. 많을 땐 12명까지 오기도 했다. 제임스 전은 이들에게 오든 안 오든 뭐라고 하지 않는다. 이번 주 일요일부터 연말 공연을 위해 이들과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갈 예정이다.

노숙인들과 함께 발레 연습을 하는 모습. 왼쪽 앞이 제임스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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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숙인들과 함께 발레 연습을 하는 모습. 왼쪽 앞이 제임스 전이다.



●“한해 발레 10번 관람… 이들이 ‘1% 엘리트’”

“(노숙인들은)나이도 있고 몸도 굳어 있어 유연성을 집중적으로 지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발레용어를 알 만큼 많이 익숙해 있지요. 세상 사는 이야기도 서로 거리낌없이 주고받을 정도로 처음보다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저 또한 그분들과 친해져 같이 잡지도 팔고 삶의 공감을 서로 나누고 있습니다. 행복합니다.”

제임스 전은 12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뉴욕에 있을 때 노숙인들과 자주 만났다. 당시를 잠시 회고한다.

“아주 돈 많은 여성이었습니다. 교통사고로 남편과 자식을 잃고 노숙인이 됐습니다. 그때 저도 생각이 난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한치 앞을 모르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도 없고, 저 또한 노숙인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가정불화나 알코올, 마약, 우울증 등 여러 가지 사연을 안고 있는 것을 보고 한순간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겨났습니다.”

그가 한국에서 노숙인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지난해 11월. 국내 한 대기업의 홍보영상 ‘나눔’ 제작에 참여할 때였다. 아이템은 ‘노숙인과의 발레’였다. 현역 발레단원들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후 노숙인들은 발레연습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발레 공연을 관람하는 등 ‘발레리노’로 거듭나기 위한 자세로 변해갔다.

“잡지 빅판을 통해 선발했지요. 그들은 발레 공연만 10번을 봤습니다. 우리 국민 중 1년에 발레 10번 보는 사람은 아마 1%도 안 될 겁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1% 선택된 엘리트입니다’라고 매주 일요일에 만나 3시간 동안 발레연습을 하고 나서 다과회를 합니다. 이때 책 팔린 얘기, 살아온 얘기 등을 진솔하게 나누지요.”

여기에 참여하는 노숙인들은 웬만한 발레용어도 알지만 처음보다 몸이 상당히 달라졌다고 제임스 전은 말했다. 스텝이나 마임, 걸어가는 자세, 여자와 손잡고 회전하는 동작 등이 그러하다. 노숙인들도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제임스 전은 이에 용기를 내 문화체육관광부와 서울문화재단 등이 후원하는 ‘지역사회 문화예술교육 활성화 지원사업’에 신청, 약간의 지원금을 따내 본격적으로 발레 수업을 하게 되면서 탄력을 얻었다. 발레를 통해 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겠다는 의욕도 더욱 커졌다.

“저도 발레를 하면서 많은 자신감을 얻었거든요. 노숙인들도 몸의 균형을 찾는 과정에서 자신감이 생겨나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분들도 정말 신이 나서 열심히 따라하고 있고요. 발레의 기본적인 움직임을 배우고 몸을 단련시키면서 잡지를 판매하기 위한 체력도 기르고 파트너와 협동심도 배우고 말입니다.”

같이 발레를 하면서 서로 영감을 주고받을 때는 예술을 왜 하는지를 느낀다고 했다. 고통을 이겨나가면서 그 과정을 얘기하는 진지한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고.

“예술단체란 좋은 작품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이 예술이지요. 그러면서 마음을 변화시키고 같이 호흡을 하고, 소외계층을 배려하고 그들의 환경을 이해하는 것도 예술의 한 작업입니다. 기존의 우리 단원들도 노숙인들과 자연스럽게 같이 발레를 하면서 교감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는 발레에 참여하는 노숙인들이 오늘은 어디에서 잡지를 팔고 있는지 목록을 들여다본다. ‘아, 강남 신사동에 가야겠네.’

편집위원 km@seoul.co.kr

[제임스 전은…]

서울에서 태어나 12살 때 미국으로 가족들과 함께 이민을 갔다. 1977년 스티브 잡스의 모교인 홈스테디 고등학교를 나온 뒤 캘리포니아 멘로파크 댄스 아카데미(Menlo Park Dance Academy)에서 발레를 배운 그는 1982년 줄리어드 예술대학에 입학했다. 1984년 유럽의 20세기 센추리-오리스 베자르(20th Century Ballet-Maurice Bejart)에서 춤을 추었다. 플로리다 발레단의 잭슨빌과 함께 일했으며, 1987년 유니버설발레단에 초대돼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서 그는 유니버설발레단과 국립발레단에서 주역 무용수와 안무가로 활동했다. 1995년 서울발레시어터 창단과 함께 상임 안무가로 16년 동안 70여개가 넘는 작품을 안무했다. 주요작품은 ‘현존 I, II, II’, ‘사계’, ‘위험한 균형’, ‘창고’, ‘이너무브’, ‘백설공주’, ‘결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2를 위한 변주’, ‘호두까기 인형’, ‘작은 기다림’, ‘봄, 시냇물’, ‘슬픈 천사의 춤’ 등이 있다.


2001년 한국 최초로 ‘Line of Life’를 미국 네바다발레시어터에 로열티를 받고 수출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 후 2002년에는 ‘이너무브’를 네바다발레시어터에 소개했으며 ‘12를 위한 변주’도 미국에서 공연해 호평을 받았다. 1998년 ‘현존 I, II, III’으로 무용예술사선정 올해의 안무가상을 수상했으며 2004년 ‘백설공주’로 제11회 무용예술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2005년 ‘봄, 시냇물’로 ‘올해의 예술상’ 무용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2003년부터 한국체육대학에서 생활무용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1-11-11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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