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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 그의 꿈①] 백남준, 천재의 첫사랑 영원으로 이어지다

[그의 삶 그의 꿈①] 백남준, 천재의 첫사랑 영원으로 이어지다

입력 2011-11-06 00:00
업데이트 2011-11-06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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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유치원 친구》 펴낸 수필가 이경희

문화계의 거물들이 다 모였다. 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을 비롯해 김영수, 정병국 전 문화부 장관과 이원홍 전 문화공보부장관, 김인규 KBS방송공사 사장,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 금진호 전 상공부장관, 문학평론가 임헌영, 소설가 한말숙, 권병현 전 주중대사,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 김종규 문화유산 국민신탁 이사장, 백남준의 ‘다다익선’ 공동제작자인 건축가 김원,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초대 관장, 박만우 현 관장 등 이름을 대기도 숨가쁘다. 여기에 ‘백기사(백남준을 기리는 사람들)’의 공동대표인 황병기, 이경희 씨와 발기인으로 마음을 이어온 송정숙 전 보건사회부 장관, 조동화 《춤》 발행인, 김용원 《삶과꿈》 대표 등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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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9일 프라자호텔 4층 메이플홀. 모임의 명칭은 ‘《백남준, 나의 유치원 친구》 출판기념회’이다. 한 사람이 쓴 책의 출판기념회를 위해 모인 사람치고는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책이 백남준을 기리는 내용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백남준을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기 때문.

이어령 전 장관은 축사에서 “유치원 친구가 제 짝을 그리는 책을 낸 것은 세계적인 일”이라면서 “백남준을 천리마, 그를 알아준 이경희 씨를 백락”에 비유했다. 천재는 지상에서 모습을 감추었어도 그를 그리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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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씨는 세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에 대한 책을 두 권 썼다. 《백남준 이야기》(열화당)와 이번에 나온 《백남준, 나의 유치원 친구》(디자인하우스)가 그것. 유치원 때의 친구에 관한 책을 두 권이나 쓴 사람도 대단하고 그 책을 쓰게끔 한 사람도 대단하다.

이경희 씨는 책을 펴내는데 도움을 준 이들에게 인사하느라 바쁜 것 같았다. 책을 끝낸 후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나기 며칠 전 이경희 씨를 만났다. 두 사람의 남다른 인연이 궁금했다.

“서울 창신동의 애국유치원을 같이 다녔지요. 어릴 적에 같이 소꿉놀이도 하고 당시 서울에 두 대밖에 없는 남준이네 캐딜락을 타고 학교에 가곤 했어요. 처음에는 나만 생각하고 있지, 그쪽에서는 나를 잊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되어 돌아왔을 때 유치원 때 친구를 기억한다는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요. 남준이가 공항에 들어왔을 때 ‘옛날 모습은 변하지 않았구나’ 생각하며 한국말 유창하게 하는 게 고마웠고 또 모습이 낯설지 않았어요. 그때가 1984년, 53세 때였지요. 44년 만에 본 것인데 공항에서 내리면서 기자들에게 유치원 때 친구 이경희를 보고 싶다는 거예요. 그 후로 자주 만나면서 우정을 키워간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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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년 만에 만났는데 어제 본 듯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의 만남을 단순한 인연이라고 말하기엔 왠지 석연치 않다. 그게 첫사랑이 아니었을까.

“나한테 대답하라면 ‘어린아이 시절인데 어떻게 사랑을 느꼈겠어요?’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백남준에게 물어본다면 ‘그럼요, 첫사랑이죠’라고 말했을 거예요. 그만큼 솔직하고 거침이 없는 사람이에요. 천재는 성에 일찍 발달한대요. 자기 자랑도 스스럼없이 하고 어린애 같은 구석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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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백남준은 이 유치원 친구가 해달라는 것은 다 해줬다고 한다. 드로잉 작품을 보내주기도 하고 전시회가 있으면 꼭 초대해서 이경희 씨를 소개했다. 바쁜 일정에도 이경희 씨를 만나는 일은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했다. 때로는 방송에 같이 나가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두 사람의 얘기를 책으로 써달라고 조르기도 했단다. 그래서 책을 쓰게 된 건가요?

“남준이가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마음먹고 썼어요. 제 얘기는 다 들어줬는데 방송국 같이 나가자는 거 안 들어줬거든요. 내가 그를 기쁘게 해주자, 사사로운 얘기뿐만 아니고 백남준의 인간적인 면을 알게 하자, 해서 썼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써달라고 해서 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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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으로부터 이어져 온 소울메이트(soul mate)

책의 출간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다. 백남준 탄생 80년이고 이경희 씨는 팔순을 맞는 기념이 되기도 했다. 출판기념회를 보면서 마치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한 자리에서 팔순잔치를 벌이고 있는 듯이 느낀 것은 나만이 아니었으리라. 평소 백남준을 사랑하는 문화예술계 인사가 그리 많이 참석한 것을 보면 사후에 백남준이 그들을 초대한 것같이 여겨지기도 했다.

“저는 책을 쓰면서 남준이가 와서 도와주고 있구나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모시기 힘든 사람이 다 와주셔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정병국 전 장관 같은 분은 국회에서 달려와줬고 이원홍 전 장관도 일찍 왔다 갔는데 나중에 다시 왔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피가 멎는 것 같은 감동이 일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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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나의 유치원 친구》를 읽으면서 여자 입장과 남자 입장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이경희 씨 입장에서는 세계적인 예술가가 유치원 때의 친구를 기억해 주는 것이 고맙다고 했지만 백남준 씨 입장에서는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이 또 얼마나 고마웠을까.

남자는 첫사랑의 여자를 항상 기억하고 있게 마련이다. 1968년 《공간》지에 쓴 백남준의 <뉴욕단상>에 보면 이경희 씨와 숨바꼭질을 하다 이경희 씨가 이마를 다친 이야기며 KBS ‘스무고개’의 인기 박사가 된 것,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것 등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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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두 사람은 전생으로부터 이어져 온 소울메이트(soul mate)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전생에 모자지간이 아니었을까,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봤다. 그렇지 않다면 유치원 때의 친구를 40여 년 만에 만나서 이렇게 사후에까지 인연이 이어질 수 있었겠는가.

“남준이가 제일 좋아한 사람이 어머니였어요. 늦게 막내로 태어났기 때문인지 어머니를 정말 좋아했고 모계의 예술성을 타고 났어요. 나도 남준이에게 모성과 연민을 느끼기도 했지요. 경희, 뭐뭐 해줘, 하고 조르는 거 보면 어린애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남자가 성공하려고 하는 이유는 첫사랑의 여인에게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남자는 여자가 없다면 성공하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백남준 씨도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자신의 성공을 보여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자기 이야기를 자기가 사랑한 여인으로 하여금 쓰게 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백남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남준 씨 보고 싶어요. 나를 기억해 줘서 고맙고 그동안에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도 이 감정을 죽을 때까지 갖고 갈 거예요. 저 세상에 가서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지난번 모스크바에서 어릴 적에 난 곳과 똑같은 곳에 상처가 났으니까 그 흉터를 보고 알아봐 주길 바래.”

글_ 김창일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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