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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푸르디푸른 꿈을 꾸다③] ‘메밀꽃 필 무렵’의 연인, 기생 왕수복(2)

[기생, 푸르디푸른 꿈을 꾸다③] ‘메밀꽃 필 무렵’의 연인, 기생 왕수복(2)

입력 2011-10-23 00:00
업데이트 2011-10-2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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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의 시집

《풀잎 Leaves of Grass》(1855년)과 같은 표제로

이효석(1907~1942)의 소설 《풀잎》(1942년)은 기생 왕수복(1917~2003)과의

사랑 이야기를 자전적 표현에 담아냈습니다.

이를 토대로 마치 기생 왕수복이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담아, 상상 속으로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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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아픈 사랑에게

이렇게 시작하려고 하면 혹 당신은 화를 내실는지요. 당신은 나에게 아픔밖에는 주지 못한 사람이었느냐고 말이지요.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던 만큼 더 지독하게 아프고, 당신을 사랑했던 만큼 더 칠흑같이 어두웠던 내 몸과 마음을 어찌 표현해야 할는지요.

태양이 그대를 버리지 않는 한 나는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

파도가 그대를 위해서 춤추기를 거절하고

나뭇잎이 그대를 위해서 속살거리기를 거절하지 않는 동안,

내 노래도 그대를 위해서 춤추고 속살거리기를 거절하지 않겠노라.

-월트 휘트먼

월트 휘트먼의 시를 나에게 들려주던 당신은 지금도 고독하고 지적인 신사의 모습으로 내 눈 안에 가득합니다. 지금도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당신을 처음으로 내 마음에 담게 된 평양의 방갈로 다방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기껏해야 천하디 천한 기생 출신 유행가수의 가슴에 담기에는 솔직히 당신은 너무 높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주위의 우정 어린 충고가 더 싫은 소리가 되고, 다방 한 켠에서 서양 고전 음악에 젖어 있는 당신의 모습을 외면하려 하면 할수록 당신의 야윈 듯한 모습이 더 아프게만 가슴속으로 헤집고 들어왔지요.

마침내 용기를 내어 당신께 전화를 하기까지 얼마나 오래고 지루하고 가슴 뛰는 시간의 터널을 지나왔는지 짐작이나 하실는지요. 원래부터 책 읽기에 욕심이 많았던 것이 그때는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모릅니다.

당신과 만나서 대화할 때 나의 지식이 짧아 혹여 답답해 하실까 봐, 고고한 당신의 지적 수준과 내가 걸맞지 않아 말 섞기를 꺼려하실까 봐, 어쩌다가 당신의 친구들과 함께할 자리라도 있게 되면 천하고 무식한 기생 애인으로 여겨져 당신이 나를 잠시라도 부끄럽게 여기실까 봐….

나는 당신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유레, 관야, 미란, 세란, 단주, 현마, 나아자, 운파, 애라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신곡》의 베아트리체, 《햄릿》의 햄릿, 《파우스트》의 그레첸, 《좁은 문》의 알리사에 이르기까지 머리와 가슴 한켠에 꼭꼭 눌러 담아 당신을 만날 준비 또 준비를 거듭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러면 뭘 하나요. 당신과의 인연이 그리도 어렵게 시작된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의 평양 대동공전 학생들은 내 집으로 찾아와 “우리 교수님을 사랑하지 말아주세요”하며 읍소를 하였으니 말이지요. 그러나 여기에 굴할 내가 아닌 것은 당신도 아시지요. 당신이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던 학생들에게, 당신은 나와 사랑해야만 건강해질 수 있다는 말로 학생들의 입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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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어울리는 사람

그게 바로 나이어야만 했고 당신은 내게 그 확신을 주셨지요. 사실 내 얼굴이 오목조목 예쁘장하거나 몸매가 가늘어서 가냘픈 미인은 아니었지만 당신은 늘 ‘달덩이 같은 환한 얼굴’에 ‘포도 알처럼 맑은 눈’이라고 칭찬해 주셨지요. 그래서 당신의 야윈 얼굴을 보며 한없이 미안해지기도 심지어는 죄스러워지기도, 한편으로는 살진 내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당신 얼굴도 달처럼 차오를 때가 오지 않을까 바라고 믿곤 하였어요.

선생님, 당신은 유일하게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당신의 귀한 교양과 경력과 인격으로 말하자면 난 감히 당신 곁에 머무를 자격조차 없었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내 안의 열정과 용기를 사서 사랑으로 만들었고 다시 나를 떳떳한 애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나는 평소부터 소설가 남편을 만나 소설처럼 낭만적인 살림살이를 꾸려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것은 당신도 잘 아셨지요. 그리고 꿈처럼 당신을 만나고 나는 잠시지만 당신을 내 꿈의 남자로 잡아두었었지요.

당신은 나를 왜 좋아하셨을까요. 당신은 당신의 돌아간 아내에게서 느꼈던 모습과 향기를 나에게서 느낀 것 같다 하셨지만, 그건 당신이 나에게 쉽게 오는 길이 아니었을까 자만해 봅니다. 그래서 나의 지난 과거 속의 세 남자에 대해서도 당신은 너그러울 수 있지 않았나 합니다.

영웅이 이름을 날린 대도

장군이 승전을 한 대도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노라.

대통령이 의자에 앉은 것도

부호가 큰 저택에 있는 것도

내게는 부럽지 않았노라.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우정을 들을 때

평생 동안 곤란과 비방 속에서도

오래오래 변함없이,

젊을 때나 늙을 때나

절조를 지키고

애정에 넘치고

충실했다는 것을 들을 때

그때 나는 머리를 숙이고 생각하노라.

부러워서 못 견디면서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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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볼 수 있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다만 당신을 진작 만나지 못했던 것만이 원통하고 또 원통했지요.

그런데 나는 그런 당신을 남겨두고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말았었지요. 그깟 옷가지들이 뭐 길래, 내 하찮디 하찮은 짐들이 무엇이길래, 당신을 두고 동경으로 갔었는지…. 그때 당신과 잠시라도 떨어져 있지 않았더라면 당신 건강이 그리 악화되지도 않았을 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더 병들게 하지도 않았을 것을, 그 옷가지들을 모두 던져버리고 그림 같은 당신 모습 앞에 그냥 그림자처럼 묻어 있을 것을….

지금도 당신의 피아노 연주 소리가 바람결인 듯 내 귀를 추억 속으로 이끌고 갈 때면 나는 어김없이 당신의 따뜻한 등 뒤에서 슬픈 새처럼 노래를 부릅니다.

나는 그대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하노라.

- 그대가 나를 만났기에 적당한 준비를 하기를 나는 요구하노라.

내가 올 때까지 성한 사람이 되어 있기를 요구하노라.

그때까지 그대가 나를 잊지 않도록 나는 뜻 깊은 눈초리로 그대에게 인사하노라.

당신은 나에게 읊어주셨던 이 시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지요. 나도 당신의 세 아이를 살뜰히 보살피고 알뜰한 새댁처럼 당신과 살림을 살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미안합니다.

그래서 더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사랑합니다.

내 인생의 아름다운 사랑에게

다시 이렇게 고쳐 부릅니다. 이렇게 부르면 화가 조금 풀리실는지요. 지금 내 머리에 흰 서리 내리고 기운 적어진 목소리 가늘게 떨리지만 당신을 마지막 보내던 그때의 마음으로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이것으로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당신을 만나러 가기 위한 용서를 받을 수 있을는지요.

그리고 몇 생이 지나 우연의 한 길목에서 당신을 만나더라도 그때는 꼭 놓치지 않으리라. 그렇게 헤어지지 않으리라.

내 가슴은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고 그때부터 다음 생은 없다는 것을….

글·사진제공_ 신현규 중앙대학교 교양학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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