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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푸르디푸른 꿈을 꾸다②] 인생은 설레는 바다, 기생 왕수복(1)

[기생, 푸르디푸른 꿈을 꾸다②] 인생은 설레는 바다, 기생 왕수복(1)

입력 2011-10-02 00:00
업데이트 2011-10-0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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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발간한 《(기생이 쓰는 기생이야기)평양기생 왕수복-10대 가수 여왕이 되다》에서 ‘설레는 바다’로 알려졌던 푸르디푸른 기생 왕수복(王壽福, 1917∼2003).

그녀의 삶과 꿈을 재구성하였습니다. 지금부터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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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기생학교 시절(1917~1931년)의 왕수복(1~15세)

나는 뜨거웠던 3·1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두 해 전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 신화를 북녘 땅에서 들은 이듬해 파란 많던 내 가수 생활을 접고 세상과 작별했지요. 지금부터 평양의 기성권번을 거쳐 1930년대 최고 인기 스타에 오르기까지의 이야기, 그리고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내 삶의 아련한 이야기들을 전하고자 합니다.

주변에서 나를 아는 사람들은 보통 쾌활하고 명랑한 내 성격에 후한 점수를 주었습니다. 심지어 인정이 많다는 말에는 다소 쑥스러워지기도 했지요. 사실 나의 외모는 목이 좀 짧아 그렇지 그래도 상체와 하체가 고루 발달되어 있는 편이라서 볼수록 육감적이라는 말도 많이 듣고 했답니다. 게다가 타고난 청아한 목소리와 풍부한 성량은 운 좋게도 우리 민족 특유의 ‘한’이라는 정서에 잘 어울렸고 높은 예술적 경지로 평가받기도 하였습니다. 좀 잘난 체하는 듯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내 독특한 가창 실력을 두고 한때는 ‘설레는 바다’라는 비유로 언론의 찬사를 받기도 했으니까요.

어느 어머니가 딸을 기생으로 만들고 싶었겠어요. 하지만 우리 집의 형편으로는 보통학교조차 다니기 힘들었고, 어느 샌가 이미 기생의 길로 접어들어 있던 언니의 선택이 어머니도 나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느껴지게 하였던 것이지요. 언니는 그 후 ‘방가로(Bungalow)’라는 다방을 평양에 열었습니다. 그 덕분에 오해를 많이 받아 곤란한 일도 간혹 벌어졌지요.

어쩌면 그것은 언니의 자취를 그대로 밟는 의례적인 절차가 되어 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나는 스스로 다르다고 생각을 다잡곤 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나는 정식으로 허가받은 기생학교 1기생이었으니까요. 물론 그 전에도 어린 기생을 교육시키는 곳은 있었지만, 공식적인 양성소로 형식을 갖추고 학교로 불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거든요. 전통적인 노래들인 가곡, 가사를 전공하면서 가야금, 장구, 무용, 미술까지도 배울 수 있었던 그곳이 나에게는 꿈에도 그리던 배움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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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전성기, ‘10대(大) 가수’의 여왕(1932~1939 ; 16~23세)

1930년대는 인기 대중 가수로서 나의 첫 번째 전성기이자, 잊혀지지 않는 삶의 순간순간이 채워진 나날이었습니다. 그 당시 처음으로 기생 출신 최초의 유행가수가 되고, 경성방송국(JODK)에서 최초 유행가 방송을 일본 전역으로 내보낸 이가 바로 나였지요. 잡지 《삼천리》 주최로 ‘레코드 가수 인기투표’에서도 전체 1위를 했지요. 마치 요즈음 ‘10대 가수’의 가수왕이 된 것처럼.

마침내 내 나이 열아홉, 사연 많은 기생인가증을 반납해서 기적에서 이름을 빼고, 일본 동경으로 성악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스물 하나에 폴리돌 레코드회사와 결별하고, 이탈리아 성악 개인 교습을 벨트라멜리(Beltramelli) 요시코(吉子)에게서 받게 되었지요. 일본 동경의 ‘무용·음악의 밤’ 자선공연에서 메조소프라노(mezzo soprano)를 맡아 우리의 <아리랑>을 성악 민요조로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 《아사히(朝日)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더욱 알려지게 됩니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가슴 뛰는 그리움이 가득 차 버리지요.

나에게 직업적인 가수생활은 열일곱 살이 되던 1933년 봄부터였습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세간에는 민요조 유행가가 크게 유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마도 억눌려 있던 민족감정과 저항 의식이라는 변수가 전통음악을 돌아보게 한 듯싶습니다. 이런 노래를 이미 민요와 창에 익숙해져 있는 권번 기생들이 부르게 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고요.

1933년 폴리도르사(社)의 폴리돌(Polydor) 레코드 상표로 취입한 <고도(孤島)의 정한(情恨)>이 엄청난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고도의 정한’이란 ‘외로운 섬에서의 한스러운 사랑’ 이라는 뜻입니다. 후에 ‘칠석날’로 고쳤지요. 그 일로 나는 폴리돌 레코드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70여 곡을 더 취입하게 되었습니다.

칠석날 떠나던 배 소식 없더니 / 바닷가 저쪽에는 돌아오는 배

뱃사공 노래 소리 가까웁건만 / 한번 간 그 옛님은 소식 없구나.

어린 맘 머리 풀어 맹세하던 일 / 새악씨 가슴속에 맺히었건만

잔잔한 파도소리 님에 노랜가 / 잠드는 바다의 밤 쓸쓸도 하다.

칠석날에 떠나는 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바닷가 여인의 애끓는 심정을 담은 이 노래는 당시 일제강점기의 아픔이 배어 있는 연정 비가(悲歌)였습니다. 나의 청아한 목소리와 독특한 발성으로 완성된 이 노래는 레코드와 함께 삽시간에 전국에 퍼져 가면서 망국의 한이 맺힌 겨레의 설움을 달래주었습니다.

폴리돌 레코드 회사는 설립 후 처음으로 최고 매상을 올렸고 왕수복의 이름은 레코드판과 더불어 전국의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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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계의 최승희가 되고자 일본으로

1937년 폴리돌 레코드 회사를 퇴사하고 나는 꿈에도 그리던 동경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일본 동경의 음악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곧 개인교습을 받는 것으로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18세기에 확립된 이탈리아의 가창기법인 벨칸토(bel canto) 창법으로는 일본 악단에서 제일의 권위자로 지적되는 벨칸토성악연구원에서 벨트라멜리 요시코 여사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게 되었지요.

1938년 12월 1일 밤 동경 재류의 조선인 자제로 조직된 중앙소년단 주최로 ‘무용과 음악의 밤’이 군인회관에서 열렸습니다. 중앙소년단은 당시 《조선일보》《매일신보》《동아일보》 3지국 후원을 받아 기본 재산을 만들고 있었지요. 그곳에서 나는 메조소프라노로 출연하게 됩니다.

조선 전래의 노래를 서양식 창법으로 노래하였는데 이 같은 시도는 이때가 처음인 만큼 동경음악계에서도 상당히 화제가 되었답니다. 그때 <아리랑>을 가곡조로 불렀던 것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벨트라멜리(Beltramelli) 요시코(吉子) 여사는 원래 일본인으로 일본 동경의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이탈리아의 유명한 소설가이면서 시인이었던 벨트라멜리 안토니오(Beltramelli, Antonio, 1873~1930)에게 시집가서 내내 이탈리아(Italy)에서 지내다가 남편을 사별하고 동경의 음악학교로 온 것이었지요.

나는 조선민요를 서양음악 발성법으로 불러 새로운 나만의 노래로 다시 만들어내고 싶었습니다. <아리랑>뿐만 아니라 <농부가>에서도 ‘얼널너 상사 뒤’하는 바로 그 멜로디나 <양산도>의 후렴 같은 것은 세계의 어느 나라 민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부드러움과 조선만의 멋이 묻어 있다고 굳게 믿은 탓이지요.

이런 내가 “민요를 살리는 것이 그 민중의 전통적 음악을 살리는 첫 길이다”라고 힘주어 말할 때 벨트라메리 요시코 여사도 이렇게 말씀하시었지요.

“제 향토에서 낳아진 노래를 가지고 세계적 성악가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이탈리아 말로 잘 부른대야 이탈리아 사람이야 따를 길 있겠느냐. 그뿐더러 제 향토 것이 아니면 정말의 생명의 음악이 생길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이 모두 다 옳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조선의 민요를 세계무대에 올려놓기 위해 동경에서 그다지 교제도 하지 않고, 또 연주회 같은 데 나와 달라고 여러 번 청을 받지마는 모두 다 피하고 오직 이 길에 자신이 생길 때까지 일로정진(一路精進)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당시 오사카(大阪) 《아사히신문》에 결의에 찬 모습의 내 사진과 기사가 실렸지요. 나는 2, 3년간 더욱 성악을 연마해서 조선의 무용을 세계무대에 소개한 최승희(崔承喜, 1911 ~ 1967)처럼 조선의 민요를 크게 알리고 싶다는 포부를 세상에 알리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었습니다.(계속)

글·사진제공_ 신현규 중앙대학교 교양학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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