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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 하재봉의 영화읽기] 헤어드레서

[Movie | 하재봉의 영화읽기] 헤어드레서

입력 2011-09-18 00:00
업데이트 2011-09-1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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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독일(이하 통독)이 주는 여러 가지 사례들은 우리에게 선험적 모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주목해야 한다. 도리스 되리 감독의 영화 <헤어드레서>가 정치적 영화는 아니지만, 좋은 영화가 항상 그렇듯이, 그것들은 올바른 정치적 식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통독 후 전개된 사회상황에 대한 예리한 분석이 함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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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되리 감독이 한국 영화팬들에게 알려진 것은 아직도 전설적으로 회자되고 있는 <파니 핑크> 부터이다. 한때 비디오 가게를 돌며 이 영화의 비디오를 사기 위해 순례하던 영화 마니아들을 나는 꽤 많이 만난 적이 있다. 폐업 비디오 가게가 늘어나면서 중고 비디오 시장으로 많은 비디오들이 풀려 나왔지만 그 속에서도 <파니 핑크>를 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운이 좋아서, 시사회에서 매우 인상적으로 보았던 이 영화의 비디오테이프를 빨리 소장하게 되었고, 그 후에도 틈만 나면 자주 틀어보았다. 도리스 되리 감독은 여성영화제에 자신의 작품이 출품되면서 한국을 찾아오기도 했는데, 그녀의 영화는 항상 정치적 올바름과 넘치는 유머, 소재와의 탄력적 거리가 제공하는 이성적 접근과 그 이상으로 풍부한 감수성 때문에, 언제나 대중적 재미를 수반하고 있다.

통독 후의 어수선한 동베를린 마르짠 자치구. 자신의 가까운 친구와 바람난 남편을 버리고 사춘기의 딸과 고향으로 돌아온 주인공 카티 쾨니히(가브리알라 마리아 슈마이데)는 취업 센터의 소개로 헤어드레서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는 통독 전 브란트 수상의 머리도 한 적이 있는 실력파다. 그녀의 이력을 듣고 무조건 채용하겠다고 했던 미용실 원장은 면접을 보기 위해 찾아온 그녀를 보고, 여기는 아름다움을 만드는 미용실인데 카티가 취업하기 곤란하다고 퇴짜를 놓는다. 이유는 그녀가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카티는 걷는 것이 힘들어 보일 정도로 거구의 몸을 가졌다. 소위 비호감 뚱녀다.

부당한 대우에 화가 난 카티는 백화점 안의 다른 공간, 폐업한 중국식당 자리를 임대 받아 미용실을 차리려고 한다. 하지만 돈이 부족하다. 그녀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찾아다니는 이동 미용실을 연다. 사회복지 센터에서 만난 전직 미용사 친구와 함께 노인들을 찾아가서 머리를 해주며 돈을 모으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그녀는 우연히 자신의 딸이 미국 유학을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돈을 몰래 잠시 빌리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폴란드 국경지대로 가서 베트남 난민들을 불법으로 밀입국시키는 일에 끼어들기도 한다. 십여 명의 베트남인들이 그녀의 비좁은 아파트에 들어와서 함께 동거하는 기괴한 상황이 펼쳐지며 그녀를 힘들게 한다. 과연 그녀의 미용실 오픈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서른이 넘은 여자가 좋은 남자를 찾는다는 것은 폭탄에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 명대사를 남긴 <파니 핑크>처럼 이 영화 <헤어드레서>에도 주옥같은 대사들이 쏟아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드리스 되리 감독으로서는 첫 번째 모험을 한 작품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쓴 오리지널 시나리오로만 영화를 만들어 오던 원칙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원작이 있는 영화를 선택했다. <헤어드레서>는 라일라 슈틸러가 쓴 시나리오가 원작이다. 동독 출신의 뚱보 헤어드레서인 실존인물 캐서린을 취재하면서 영화의 영감을 얻은 작가 라일라 슈틸러는,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시련에 맞서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완성시켰고, 이것의 대본화 작업을 지켜본 도리스 되리 감독은 처음으로 자신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다른 사람이 쓴 시나리오를 연출하기로 결정한다.

여주인공 카티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동독 출신 뚱보 헤어드레서이며 싱글맘이다. 동독 시절 노동자를 위해 지어진 좁고 낡은 고층아파트들이 줄지어 서 있는 슬럼가였지만, 현재는 세련된 현대식 백화점과 아름다운 산책로가 있는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도리스 되리 감독은 이 공간을 영화의 주 촬영장소로 결정함으로써 과거의 독일과 현재의 독일을 모두 담아내려고 했다.

늘 고장 나 있는 엘리베이터 때문에 높은 층수의 아파트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그들 아파트 근처에 있는 현대식 백화점을 한 공간에 담아냄으로써 통독과 함께 변화된 삶의 환경을 제시하면서 그 과정에서 소외된 아웃사이더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헤어드레서>의 외형적 줄거리는 뚱보 헤어드레서가 미용실을 오픈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많은 에피소드들이 차지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빈곤과 실업 문제라든가, 불법이민, 소수민족, 뚱보에 대한 사회적 차별 등이 중요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도리스 되리 감독은 이상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 않는다. 그녀의 냉정한 현실인식은, 힘겹게 오픈한 미용실이 곁에 있는 다른 미용실의 제보로 들이닥친 정부 관리가 바닥재 규정이 미달되었다고 오픈을 보류하게 만든다. 불법 이주한 베트남인 남자와 뭔가 시작될 것 같던 그녀의 설렘도, 하룻밤 풋사랑으로 끝나버린다.

도리스 되리의 주인공들은 강력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세상이 내 편에 서주지 않는다면 내가 내 편에 서겠어’라는 정신은 그녀의 주인공들로 하여금 쉽게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게 만든다. <헤어드레서>의 카티 역시, 자신의 친구와 불륜을 저지른 남편을 원망하는 대신, 그리고 엄마의 마음은 모른 채 소통을 거부하고 혼자서 미국 유학을 꿈꾸는 딸을 미워하는 대신, 자신의 어려운 삶을 해치고 꿋꿋하게 살아가려고 한다.

<헤어드레서>를 보고난 뒤 가장 강렬하게 남는 것은 여주인공 카이 역의 배우 가브리엘라 마리아 슈마이데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이 영화의 촬영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동베를린에서 연극배우로 성장한 그녀는 통독 후 TV와 영화에서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하얀 리본>에서도 어린 아이들과 함께 나오는 그녀를 볼 수 있다.

도리스 되리 감독은 1983년 첫 장편영화를 만든 후 <남자들>(1985)이라는 영화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장편 극영화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에도 관심을 갖고 아시아 문화를 다룬 다큐멘터리도 만들었으며, 소설과 단편 동화책까지 집필하는 작가로서도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과 함께 오페라 무대를 연출하기도 했다.

한국 관객들을 위한 팁 하나, 카티를 통해 폴란드 국경을 넘어 몰래 독일로 잠입하는 베트남 난민인솔자 티엔 역을 맡은 배우는 재독일 한국계 배우 김일영 씨다. 독일에서 배우 겸 영화감독으로 활동 중인 김일영 씨가 맡은 티엔은, 유부남이지만 베를린 정착 과정에서 카티와 하룻밤 풋사랑을 하는 비중 있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글_ 하재봉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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