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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에세이 | 슬로시티 청산도] 들락날락, 꼬불꼬불, 구불구불…오래 머물고 싶은 곡선의 섬

[포토 에세이 | 슬로시티 청산도] 들락날락, 꼬불꼬불, 구불구불…오래 머물고 싶은 곡선의 섬

입력 2011-09-18 00:00
업데이트 2011-09-1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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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에 이어 근래 청산도 슬로(Slow)길이 화제에 올랐다. 자연 그대로의 청산도 시골 섬길을 느리게, 천천히 걷는다는 것이다. 국제 슬로시티(Slow City)연맹으로부터 청산도가 아시아 최초 슬로길 1호로 공식인증을 받고, 지난 4월 그 선포식을 가짐으로써 일반에도 널리 알려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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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시티란 말 그대로 ‘느리게 사는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런 마을 안 자연풍경 속에 푹 파묻혀 천천히 느릿느릿 걸어보자는 것이 슬로길의 컨셉트이다. 1991년 인구 1만 4천명인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그레베 인 키안티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당시 그레베의 시장(市長) 파올로 사투르니니(Paolo Ssturnini)가 마을사람들과 함께 세계를 향해 ‘느리게 살자’고 호소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재 19개 국가 125개 회원타운으로 확대되었으며 이에 동참하려는 나라와 마을들이 줄을 서고 있어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슬로시티는 국제연맹에 신청만 하면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다. 친환경·전통문화 보존·자연 그대로의 생활방식 등 26가지 까다로운 심사기준이 있어 이에 통과되어야만 인증을 받을 수 있다. 청산도는 그 조건의 검증절차를 다 끝냈다.

사실 청산도 가는 길은 멀다. 전라남도의 남쪽 끝 완도에서 여객선을 타고 50분쯤 더 남쪽으로 가야 한다. 고속도로가 잘 만들어진 요즘에도 서울에서 완도까지는 직행버스로 5시간 40분, 완도에서 청산도까지 여객선으로 50분, 총 6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차를 타고 내리는 시간과 중간에 좀 쉬어 가는 시간까지 합치면 꼬박 하루가 걸리는 거리다.

청산도의 섬 크기는 서울 여의도의 다섯 배 정도, 우리나라 전체 섬 가운데 스물세 번째라고 하지만 주민은 2,300여 명밖에 안 된다. 교통은 완도를 오가는 배편뿐이다. 그래서 도시의 변화에 영향을 덜 받았고, 옛날부터의 전통생활양식을 잘 보존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청산도 사람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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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남쪽에는 매봉산(해발 385m)·보적산(321m), 북쪽에 대봉산(334m) 등이 우뚝 솟아 그 산자락으로 섬에는 돌·바위·절벽이 많고, 편편한 평지가 적다. 좁은 경작지를 늘리기 위해 산 중턱까지도 개간을 하여 논밭을 만들었으며, 특히 경사지를 이용한 계단식 논을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다. 토질이 박토이고 자갈이 많아 구들장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계단식 논을 만들 때 구들장처럼 돌을 밑에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논에 수분을 오래 유지케 하는,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방법을 고안했다.

청산도는 옛날에 무척 가난했다고 한다. “속을 모르면 청산도로 시집가지 말라”는 말이 지금도 완도에서는 오간다고 한다. 청산도로 잘못 시집가면 평생 죽도록 고생만 한다는 얘기이다.

청산도는 완도에서 제주도로 가는 뱃길 중간 길목에 위치하므로 예부터 제주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제주도에서 와서 정착한 해녀들이 지금도 물질을 하고 있고,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돌담과 돌담길이 도처에 있다. 상서리와 동촌리의 돌담길은 2006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을 정도이다. 섬 남쪽의 범바위에 올라서면 날 좋은 날 제주도 한라산이 보인다고 하며, 제주도로 유배 가는 사람들이 머물다 간 때문인지 “청산도에 가서 글 자랑 말라”는 말이 남아 있는 문향의 고장으로도 소문났다.

청산도에는 초분(草墳)이 있다. 섬 특유의 장례방식인데 요즘도 초분을 쓴다고 했다. 초분은 풀 무덤이다. 가족이 고기잡이를 나가 장례를 치룰 수 없었을 때 시신이나 관을 땅에 올려놓은 뒤 짚이나 풀로 엮은 이엉을 덮는 매장방법이다. 2, 3년 지난 후 시신이 깨끗이 썩고 나면 날을 잡아 땅을 파고 모셨다고 한다.

경제개발 과정에서도 뒤쳐져 있던, 세상에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던 조용한 청산도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1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서편제> 촬영지로 알려지고부터이다. <서편제>에서 유봉 일가가 황토길을 내려오며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등짐을 둘러멘 아버지(김명곤 분)와 아리랑을 선창하는 딸(오정해 분), 이에 북채를 힘껏 두드리는 아들(김규철)이 어깨를 들썩이며 설움인지 기쁨인지 모를 한 곡을 뽑아내는 영상이 가슴 짠하게 여운을 남겼던 것이다. 청산면에서는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해 딸 송화가 득음을 하려고 피눈물 나는 소리 공부를 하던 초가도 새로 복원해 놓았다.

<서편제> 다음으로 KBS 드라마 <봄의 왈츠>가 청산도에서 촬영됐다. 드라마 촬영을 위해 유채꽃 청보리밭 돌담길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당리 언덕에 2층 양옥 오픈 세트장이 세워졌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바닷가 언덕 위의 하얀집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멋진 색감의 식탁과 바깥 풍경이 시원스레 내다보이는 큰 창, 그리고 피아노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2층으로 올라가면 아늑한 침실이 있고 창밖으로는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KBS에서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이곳 이외에도 청산도의 여기저기가 배경으로 소개됐다. <가을 동화> <겨울 연가> <여름 향기>

<봄의 왈츠> 등 계절 시리즈를 기획 방영하면서 봄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장소로 청산도가 뽑힌 것이다.

드라마 <봄의 왈츠>를 보고 청산도 가는 길을 묻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고 한다. 완도와 청산도를 오가는 500명 정원의 여객선이 평일에 5번, 주말에 8번이 있는데 항상 꽉꽉 차고, 주말이나 연휴의 경우는 미리 예약을 해야 좌석을 잡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지난 4월엔 한 달 동안 6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왔었고, 계절에 관계없이 전체적으로 60%쯤 많아졌다는 즐거운 비명이다. 특히 <서편제> <봄의 왈츠> ‘슬로시티’ 등으로 한국 여성이라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가보고 싶은 곳 1위의 섬이 된 것이다.

청산도에는 마라톤 풀코스 거리와 같은 42.195㎞의 슬로길이 만들어졌다. 여객선이 도착하는 도청부두를 출발점으로 11개 코스로 나누어 코스마다 이름을 붙이고, 발길 닿는 대로 구불구불 섬을 한 바퀴 둘러보는 길이다.

청산도에는 반듯한 길이 없다. 해안선도 들락날락, 논두렁도 꼬불꼬불, 돌담도 구불구불한 곡선의 섬이다. “곡선은 서두르지 않는다. 휘면 휜 대로, 굽으면 굽은 대로 둘러가고, 힘들면 굽 언저리에서 쉬었다가 가면 그만이다. 우리 가락을 닮은 듯 유연하게 꺾인 굽이마다 애절한 사연 깃들었을 섬. 그러니 누구든 청산도에선 이 느린 풍경의 속도에 몸을 맞춰 걸으시라”고 청산도 사람들은 권한다.

슬로길을 느릿느릿 걸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순환버스가 등장했다. 도청부두에서 시작하여 당리→읍리→범바위→신흥해변→진산리 갯돌밭→지리청송해변→도청부두로 돌아오는 버스인데 총 2시간 30분이 소요되고 중간중간 어디에서나 내렸다가 다음 버스를 탈 수도 있다. 버스 기사 김봉안 씨는 문화관광해설사를 겸해 구수한 목소리로 청산도의 과거와 현재, 곳곳의 얘기를 기억에 남도록 전해준다.

“청산도 나무의 90%는 소나무이고, 거친 해풍 속에서 자란 단단한 소나무여서 조선수군(水軍)의 배를 만드는 데 주로 썼다” 던지, “일제강점기에만 해도 청산도에서 고등어가 너무 많이 잡혀 큰 고등어 두 마리를 주어야 붕어빵 한 개를 사서 먹을 수 있었고, 고등어를 밭의 퇴비로 쓸 정도였다” 던지, “청산도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을 잘 해서 요즘은 서울 사람보다 잘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자랑도 했다. 그리고 청산도에서는 “전복·광어·김·미역·톳 등의 양식으로 큰 소득을 올리고 있고 마늘 재배로 유명하다. 마늘은 8톤 트럭으로 200대 분을 해마다 서울 가락시장에 내놓는다”고 했다.

가난했던 청산도는 이제 가난하지 않다. <서편제> <봄의 왈츠> ‘슬로길’로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섬 전체가 소란스러워지는 듯했고, 이들을 즐겁게 다녀가게 하느라 바쁜 듯 보였다. 청산도에는 모텔이나 여관 같은 게 없고, 수요에 의해 나날이 민박집이 늘어나 현재 83개소나 된다.

조용하던 ‘느리게 사는 사람들의 마을’(슬로시티)이던 청산도가 아쉽게도 전국의 관광객들이 몰려 북적대는 섬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슬로길이 아니라 여행사에서 안내하는 관광, 시간에 쫓겨 대강대강 둘러보고 바쁘게 떠나야 하는, 바쁜 길이 되어 가고 있다.

좋다는 소문이 나면 어디라도 찾아가는 시절이다. 산·바다·하늘이 모두 푸르다해서 청산여서(靑山麗水)로 불리는 청산도. 청정바다를 끼고 전통적인 생활문화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청산도에 언젠가 다시 한 번 와서 천천히 며칠 지내고 싶다.

창산도 슬로길이 소문이 나자 우리나라 곳곳에서 슬로길을 열려 하고 있다. 청산도 슬로길 외에도 전라남도에서 세 곳이 더 슬로시티로 국제슬로시티연맹의 공식인증을 받았다. 담양군의 고택을 휘돌아 담장 아래로 호젓이 걷는 창평면, 장흥군의 유치와 장평, 신안군의 소금밭을 가로지르는 증도이다. 이 밖에 하동군과 예산군, 남양주시와 전주시 한옥마을이 슬로시티로 추가 지정됐다.

글·사진_ 김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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