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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문] 이야기도 소문도 많은 4대문 4소문

[서울의 문] 이야기도 소문도 많은 4대문 4소문

입력 2011-05-22 00:00
업데이트 2011-05-2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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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입납”이란 말이 있다. 원래의 뜻은 이름도 모르고 주소도 모르면서 남대문 입납이라고 써서 편지를 보낸다는, 약간은 조롱 섞인 말이다. 또 “남대문에서 김 서방을 찾는다”라는 말도 있다. 이것 역시 비슷한 표현이다. 앞뒤가 안 맞고 무모한 일을 저지를 때 비웃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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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예부터 문이 많은 도시이다. 서울로 정도를 한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뜻이다. 1394년 태조는 정도전에게 지시하여 서울을 에워싸는 도성을 축조하게 하고 큰 문 4개와 그보다 약간 작은 문 4개를 만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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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하루아침에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을 세울 자리도 잘 봐야 하고, 8개의 문마다 의미를 부여해야 하고, 뜻 깊은 이름도 만들어야 하고… 일이 많다. 기록에 따르면 49일 동안 11만 8070명이 동원되어 성을 쌓았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지녀야 할 5대 덕목은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이다.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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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4대문의 이름에 인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동쪽에 있는 대문을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하고, 서쪽의 대문을 돈의문(敦義門)으로 하고, 남쪽의 대문을 숭례문(崇禮門)으로 했다. 이제 남아 있는 하나의 문인 북쪽의 대문에 지(智)·신(信)을 붙여 이름을 지어야 했다. 이때 일각에서 지(智)자 대신에 숙정문(肅靖門)이라고 이름 짓는 것이 풍수지리상 좋을 듯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그 이름으로 결정이 되었고, 나머지 신(信)자는 보신각(普信閣)으로 칭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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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북문인 숙정문이다.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유부녀들이 바람이 날 수 있기 때문에 닫아야 한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잠깐 열었다가 닫아 버렸다. 북문을 안 쓴 것이다. 아니 안 쓴 것이 아니라 못 쓴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경복궁 머리 위로 백성들이 지나 다니는 꼴이 영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핑계를 댄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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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북문은 약 5년 전에 개방이 되어 지금은 아무나 신고만 하면 갈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북문의 사정이 이런 지경이라서 어떤 사람들은 세검정에 있는 홍지문(弘智門)이 북문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동대문인 흥인지문은 사연을 많이 안고 있다. 우선 약간씩 기울어진다는 것이다. 처음 세울 때부터 그런 기미가 생겼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수맥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동북쪽으로 기울었다가 봄이 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문은 꼬리를 물고 커져서 나라에 큰 일이 생기면 동대문이 기울어진다는 이야기들이 퍼져 나가기도 했다. 특히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쫓겨나 영월에서 사약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을 때 흥인지문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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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인 돈의문은 경희궁 정문에서 고개로 올라서면서 있었다. 이 문은 지금 없다. 그러나 곧 복원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반갑다.

이번엔 남대문이다. 숭례문. 서울의 정문이다. 이 대문은 정말로 수난이 많다. 태조 때 세워졌지만 세종 때 다시 고쳤고, 성종 때 또 고쳤다. 그리고는 500년 동안 아무 일이 없다가 1962년에 약간 기울어지는 바람에 중건을 했다. 그런 숭례문, 우리나라 국보 1호가 2008년 2월 10일,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다른 대문들은 모두 현판이 가로로 되어 있지만 숭례문만 세로로 세워져 있다. 이것은 ‘불’ 기운을 가지고 있는 관악산을 경계하기 위한 것인데 그 대문을, 600년이나 잘 버틴 서울의 정문에 불 지른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다는 말인가? 숭례문의 현판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역시 양령대군의 글씨라는 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 이 현판이 임진왜란 때 분실된 적이 있다. 그런데 청파역 배다리 밑에서 발견되어서 천신만고 끝에 다시 제자리에 걸렸다. 이번 불에 타서 전소되었을 때에도 다행스럽게 현판을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북대문인 숙정문은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삼청 터널을 지나서 왼편으로 초소가 있는데, 그곳에서 신청을 하면 자세히 안내해 준다. 좀 긴 거리를 걷고 싶으면 정릉이나 아리랑 고개에서 출발해도 좋다. 공기도 좋을 뿐더러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자, 이젠 4소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동소문은 원래 홍화문이라고 불렀다가 창경궁의 정문 이름과 같아서 혜화문이라고 고쳤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삼선교로 넘어가는 고개 위에서 왼편으로 올려다보면 예쁜 문이 나오는데 그것이 혜화문이다. 서소문은 서대문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없어졌다. 이름은 소의문이고 이 또한 돈의문과 함께 복원할 계획이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남대문과 대칭되는 남쪽의 소문은 광희문이다. 퇴계로 6가가 끝나는 지점에서 장충단 방향으로 접어들면서 왼편에 서 있다. 이 광희문은 죽은 이의 시신이 이 문으로 나간다고 해서 한때 시구문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그건 모두 옛날 이야기이다.

북쪽의 소문 그러니까 북소문에 해당되는 문은 창의문이다. 청와대 옆으로 가는 고갯길 꼭대기에 서 있는 이 문을 자하문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연유가 있다. 조선조 후기에 어떤 임금(숙종이라는 설도 있고 정조였다는 설도 있음)이 창의문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는 “자색 노을이 발 아래에 자욱하구나.”라는 말을 하는 바람에 자하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도 이곳 주민들은 자하문 밖이라고 하지 않고 ‘자문 밖’이라고 한다. 이른바 애칭인 셈이다. 자문 밖을 지나서 부암동 뒤편 또는 평창동 건너편에는 ‘백사실’이라는 아주 아름다운 계곡이 있다. ‘개도맹’을 살리고 있다는 곳인데 즉, 개구리, 도롱뇽, 맹꽁이가 살아 있는 자연 보존지역으로 서울에서 하나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서울의 문안을 들어오려면 이렇게 8개의 문 가운데 하나를 통과해야만 했다. 두 개의 문이 없어져서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5개의 문이 건재해 있고 숭례문도 곧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니 고마운 일이다.

글_ 정홍택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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