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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이 만난사람] ‘수제자’ 석경징 서울대 명예교수, 스승 피천득을 말하다

[김문이 만난사람] ‘수제자’ 석경징 서울대 명예교수, 스승 피천득을 말하다

입력 2011-05-13 00:00
업데이트 2011-05-13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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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꼬 사랑하고 질투한 청년 ‘영원한 소년’인 선생님과 달라 출판사가 ‘인연’ 수필로 펴내”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5월 속에 있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금아 피천득이 생전에 읊었던 ‘5월’이라는 시의 한 대목이다. 금아는 ‘영원한 5월의 소년’이라고 할 만큼 5월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1910년 5월 29일 태어나 2007년 5월 29일 97세에 땅에 묻혔을 정도니 말이다. 그래서 “5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야.”라고 늘 말했다. 금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소설가 최인호씨는 “전생의 업도 없고 이승의 인연도 없는, 한 번도 태어나지 않은 하늘 나라의 아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고(故) 박완서씨는 “그분은 연세와 상관없이 소년처럼 무구하고 신선처럼 가벼워 보였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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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과 피천득 선생의 4주기를 앞두고 지난 9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앞뜰에서 만난 석경징 교수가 스승 피천득 선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스승의 날과 피천득 선생의 4주기를 앞두고 지난 9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앞뜰에서 만난 석경징 교수가 스승 피천득 선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문득 생각나는 추억이 있다. 금아는 2002년 월드컵 때 실로 오랜만에 시를 썼는데 제목이 ‘붉은 악마’였다. ‘붉은 악마들의/끓는 피 슛! 슛! 슛 볼이/적의 문을 부수는/저 아우성! 미쳤다. 미쳤다/다들 미쳤다 미치지 않은 사람은/정말 미친 사람이다.’라고 했다. 돌아가시기 1년 전 5월 금아의 자택을 찾았을 때 그는 “허허,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 줄까. 영국의 버나드쇼가 채식주의자였어요. 나이 들어 죽었는데 이때 ‘런던타임스’에서 사설에 뭐라고 했냐 하면 ‘버나드쇼 장례 행렬에는 염소와 소, 양떼들이 울면서 뒤를 따랐다.’라고 했지. 평생 동안 육식을 안 했으니깐 그놈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어. 어쨌든 사설에 그런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해.”라고 했다. 금아는 또 “5월이 되면 환갑이 넘은 늙은 제자들이 자주 찾아온다.”면서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웃었다. 당시 제자들 중에는 문인도 있었지만 정년퇴직한 대학교수들이 더 많았다.

사실 금아는 생전에 ‘제자’라는 말을 함부로 안 썼다. 또한 ‘스승’이라는 말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한 사람은 예외였다. 여러 제자들 중에 석경징(75) 서울대 명예교수한테는 ‘수제자’라는 말을 썼다. 그것도 직접 얘기하지 않고 아들 피수영씨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석 교수는 1955년 서울대 사범대 영어과에 입학할 때 금아에게 ‘영문학사’와 ‘영시’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고 4년 전 돌아가실 때 가족 외에 유일하게 임종을 지켜본 제자였다. 특히 그는 “영문학사를 배울 때 문학사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을 샘플링하는 독특한 강의법으로 인기를 끌었다.”고 회고했다. 대학원 때에는 금아가 지도교수 역할을 했다. 또한 대학 4학년 때 금아의 권유로 제물포고와 서울고에서 잠시 영어 교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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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과 금아의 4주기를 앞두고 지난 9일 오후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앞뜰에서 석 교수를 만났다. 비 오기 직전의 흐린 날씨였지만 스승을 말하는 노제자의 얼굴빛은 무척 밝아 보였다. 우선 석 교수의 근황부터 물었다.

“서울 강남문화원에서 영미소설을 강독하고 있습니다. 수강생은 가정주부와 대학원 다니는 사람 등 다양합니다. 다들 문학에 대한 갈망이 깊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4년이 됐군요. 원래는 서울대 현직에서 하고 싶었던 일이었는데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영문으로 강독하고 한글로 풀이해 주는 작업이다. 그동안 단편소설의 경우 400여편, 장편인 경우 6권 정도 강독했고 지금은 ‘다 읽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는 20세기 대표작 제임스 조이스의 장편 ‘율리시스’를 강독하고 있다. 그는 “2년 반 동안 아직도 3분의1 정도밖에 진도를 못 나가고 있다. 뭘 그리 꾸물대는지.”라면서 웃었다.

이어 금아 얘기가 나오자 그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20년 동안 거의 매주 한 차례 이상 자택(서울 반포)으로 찾아뵈었다.”면서 “제자들이 식사를 대접하려고 해도 선생님은 ‘인세받는 것도 있는데’ 하시면서 항상 먼저 밥값을 내셨다.”고 회고했다. 석 교수는 금아가 운명하기 직전 3일 동안 병상을 지켰다. 이때 금아는 석 교수의 손을 잡으며 “석 선생이 제일 무서워.”라고 말했다. 평소 있는 그대로 스승한테 진언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선생님의 생애는 말 그대로 무소유의 삶이었습니다. 사치와 낭비를 가장 싫어했지요. 돌아가실 때 많았을 것 같은 책도 200여권에 불과했고 평소 그 흔한 옷장도 없이 살았습니다. 누군가 내다 버린 책상을 갖다 쓰고 사모님이 피란 때 싼 보따리를 옆에 놓고 지냈지요. 선생님 정도의 명성이면 문학단체 등에서 명예로운 직함을 가질 법도 한데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지요. 제자들한테 뭘 받는 것도 싫어해 이사할 때 벽걸이 시계를 선물한 것이 유일합니다.”

석 교수가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중요한 얘기’를 꺼냈다. 다름 아닌 금아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수필 ‘인연’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인연’은 수필이 아닙니다. 소설이지요. ‘아사꼬’의 상대역인 그 청년은 한낱 소설 속의 주인공인데 수필로 분류되는 바람에 피 선생님이 수필 속의 청년으로 잘못 인식돼 있습니다. 생전에 선생님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아무려면 어떠냐’ 하는 식으로 그냥 웃어넘기셨지요.”

석 교수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인연’에 나오는 청년은 약간 치졸하고 질투심 많은데 금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강조했다.“선생님은 서울 YMCA를 통해 도쿄 YMCA 관계자를 만나 기숙할 집을 소개받았습니다. 그때 잠시 보게 된 것이 수필 ‘인연’에 나오는 아사꼬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저 잠시 봤을 뿐인데 마치 선생님이 아사꼬를 사랑하고 질투한 것처럼 묘사가 됐습니다. 수필이 아닌 소설이지요.”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됐을까. 석 교수의 회고는 이렇다.

“1959년입니다. 출판사 일조각에서 ‘금아시문선’을 발간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쓰신 글을 함께 묶어 책을 내면서 소설로 쓴 ‘인연’도 ‘문선’이라는 수필로 나왔지요. 그후 정정이 안 됐고 그게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석 교수는 서울신문 인터뷰를 통해 금아의 대표 수필로 알려진 ‘인연’은 소설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몇 번 강조했다. 그러면서 “금아의 수필 중에 소설인 것이 더 있다.”고 했다. ‘은전 한잎’의 경우 통렬한 사회비판 소설인데 수필로 돼 있는 것도 모순이라고 했다. 아울러 ‘시골 한약방’도 소설이며, ‘수필은 청자연적’이라고 한 작품 ‘수필’은 수필이 아닌 시라고 말했다.

석 교수는 이어 금아가 일제 때 중국 상하이로 간 까닭을 얘기했다.

“선생님은 춘원 이광수와 친했습니다. 그 집에서 3년 동안 살면서 영어를 배웠지요. 춘원은 선생님한테 일본으로 가지 말고 중국으로 가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때는 일본으로 가면 장래를 보장받는 분위기였지만 춘원은 중국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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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0월 제주 여행때 석경징(왼쪽)교수와 피천득 선생이 호텔 로비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1995년 10월 제주 여행때 석경징(왼쪽)교수와 피천득 선생이 호텔 로비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석 교수는 다시 스승을 그리워한다.

“선생님은 인디언처럼 흔적 없이 살았습니다. 사모님이 지난달 돌아가셨는데 평소 ‘저 사람보다 내가 먼저 가면 안 되는데’라고 하셨지요. 정신고녀 출신인 사모님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사모님한테 베토벤 음악을 들려주시고 셰익스피어의 시를 읊어 주셨습니다.”

그는 또 금아에 대해 “낭만주의 시와 스피노자를 좋아했고, 명석하고 군더더기 없는 삶을 사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단순하고 치장이 없는 금아의 글은 영원불멸이라고 말했다.

편집위원 km@seoul.co.kr

◆석경징 서울대 명예교수는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55년 서울고, 1959년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63년 서울대 대학원(영문과)을 나온 뒤 1965~1966년 미 인대애나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1973~1975년 미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 박사과정에서 언어학, 현대영문학, 일본문학, 언어철학 등을 공부했다. 1968년부터 2001년까지 서울대 인문대 영문과 교수를 지냈으며 1980년부터 1990년대에 걸쳐 ‘서술이론연구회’를 주재했다. 현재는 서울대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서울 강남문화원에서 영미소설을 강독하고 있다.

2011-05-13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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