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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나카히로 이와타/김상연 워싱턴 특파원

[특파원 칼럼] 나카히로 이와타/김상연 워싱턴 특파원

입력 2011-03-19 00:00
업데이트 2011-03-19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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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히로 이와타. 도쿄신문 워싱턴 특파원이다. 그와 내가 처음 만난 건 지난 9일이다. 워싱턴에 부임하기 전 도쿄신문 서울 특파원인 시로우치 야스노부가 “아주 유능한 특파원이 워싱턴에 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전화번호를 적어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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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연 워싱턴 특파원
김상연 워싱턴 특파원


나카히로와 나는 워싱턴 시내 ‘내셔널 프레스 빌딩’ 꼭대기층 라운지에서 만났다. 그는 서글서글한 인상에 일본인 특유의 예절이 몸에 밴 중년 남성이었다. 우리는 일본어 악센트가 묻은 영어와 한국어 악센트가 담긴 영어로 인사를 나눴다. 임기가 6개월 남았다는 나카히로는 외국 기자로서 미국 정부를 취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명해줬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정말 ‘처절하게’ 얻어냈다는 한 정부 관리의 연락처를 적어줬다. 일종의 ‘영업비밀’을 선뜻 공개한 셈이다.

그는 “연락처를 몇개 더 알고 있는데 지금은 갖고 있지 않다.”면서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감사를 표시하면서 커피값을 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인데요.”라면서 내 지갑을 따돌렸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컴퓨터를 켰을 때 놀랍게도 나카히로가 그새 보낸 이메일이 두 통이나 들어와 있었다. 거기에는 그가 발로 뛰어 얻어낸 연락처들이 담겨 있었다.

나카히로가 그날 ‘패키지’로 베푼 친절은 내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 룰로 따지자면 그는 나한테서 보답을 ‘테이크’할 기회가 앞으로 거의 없다. 그런데도 자신이 가진 거의 모든 노하우를 나한테 ‘기브’한 것이다.

그리고 이틀 뒤 일본에서 참사가 일어났을 때 나는 문득 나카히로를 떠올렸다. 나는 이메일을 열어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나카히로씨, 당신의 나라가 엄청난 재난을 당한 것을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당신을 비롯한 일본 국민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합니다. 일본 국민이 이 재난을 반드시 극복하리라 믿습니다.’

편지를 보내고 나서야 좀 겸연쩍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후 인터넷에 들어가 보고 나는 나의 감정이 나만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봇물 터진 한국인의 온정이 벌써 현해탄에 범람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는 한·일 관계에 있어서 이런 현상이 이례적이라면서 구구한 분석을 시도하지만, 부질없는 일이다. 한국인이 지금 일본에 베풀고 있는 마음은, 관계의 특수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류의 보편적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본성을 두고 맹자(孟子)가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정의한 이후 2000년이 지나도록 과학은 이 심리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분석해 내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반사적으로 구하려 달려든다. 이는 그 아이의 부모와 사귀려 함도 아니며, 마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함도 아니며, 원성을 듣기 싫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라고 맹자가 지목한 바로 그 마음이 지금 한국인들이 품고 있는 마음인 것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한·일은 다시 독도와 과거사, 교과서 왜곡 문제 등을 놓고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그때 혹여 우리가 ‘아낌없이 베풀었더니 결국 이렇게 보답하는군. 역시 일본이라는 나라한테는 잘해주는 게 아니었어.’라고 섭섭해한다면, 우리 스스로 우리의 고결한 측은지심을 절하(切下)하는 격이 된다.

‘이번 온정의 물결을 한·일 관계를 개선시키는 계기로 삼자.’는 얘기도 우리 입으로 할 말은 아니다. 사랑은 조건 없이 ‘기브’하고 ‘테이크’를 바라지 않을 때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 사랑을 주고 나서 아예 잊어 버리는 국민의 품격은 얼마나 고매한가.

편지를 보낸 며칠 뒤 나카히로한테서 위로해줘 고맙다는 답장이 왔다. 갑자기 터진 고국의 재앙에 슬퍼하랴, 기사 쓰랴,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사태가 좀 수습되면 나카히로에게 한국 음식을 대접해야겠다.

carlos@seoul.co.kr
2011-03-19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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