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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 그의 꿈] ‘실험극장’ 50년, 황야에 집을 짓는 작업은 오늘도 계속된다

[그의 삶 그의 꿈] ‘실험극장’ 50년, 황야에 집을 짓는 작업은 오늘도 계속된다

입력 2011-02-13 00:00
업데이트 2011-02-13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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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승 실험극장 대표

지난해 12월 13일 오후 아르코예술극장에서는 ‘극단 실험극장 창단 5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배우들이 하루 밥벌이도 하기 어려운 우리나라 연극계에서, 민간 극단이 지천명의 나이를 맞았다는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한승 대표와의 인터뷰는 2010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오후에 이루어졌다. 며칠 전에 만나기로 했었는데 이 대표의 바쁜 일정 때문에 한 차례 미루어진 것이다. 회사에서는 종무식도 끝난 오후, 혜화동에 위치한 실험극장의 사무실로 향했다. 길은 미끄러웠고 바람은 차가웠다. 이한승 대표 혼자서 조용히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한 해가 저무는 마지막 날 오후, 실험극장의 이한승 대표와 기자가 마주 앉은 둘만의 송년회, 늦었지만 50주년 축하인사부터 나누고 실험극장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극단 신협이 우리보다 오래됐지만 유명무실하고 지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극단으로서 50년이 된 극단은 우리가 유일한 것 같습니다. 실험극장 이후로 산울림, 민중극단, 광장, 자유극장 등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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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극계의 살아 있는 역사, 실험극장

‘실험극장’이라는 명칭은 단원 각자가 연극을 위한 실험도구가 될 것을 자원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시 서울대, 고대, 연대 연극부 출신들이 중심을 이룬 실험극장은 처음에는 동인제 방식을 택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김동훈 씨가 대표를 맡으면서 대표체제로 운영되다가 2005년 정관 개정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대표체제로 전환되었다. 말이 좋아서 대표체제지 실상은 대표가 모든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척박한 연극계에서 실험극장이 오랫동안 그 명맥을 유지해 온 원동력은 무엇일까?

“몇 번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창단한 지 2년 후에 단원들이 빠져나가 다른 극단으로 가기도 했고 TV가 생기면서 배우들이 대거 TV로 간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김동훈 씨를 비롯한 주축이 그대로 남아서 활동했지요. 가장 결정적인 때가 김동훈 대표가 1996년 세상을 떠났을 때입니다. 23년 동안 대표직을 맡아오다가 갑자기 자리를 비운 충격을 이겨 내기가 힘들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영광 속에 간판을 내리자고 주장했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맡기로 했는데 벌써 11년이 흘렀습니다.”

다른 감투라면 서로 맡겠다고 하겠지만 연극계에서 극단의 책임자로 나서겠다는 말은 곧 무한희생과 열정, 자금의 조달을 책임진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걸 당시에 톱 클래스 배우도 아니고 돈 많은 사업가도 아닌 한 중견배우가 맡기로 한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상당히 무모하기도 한 결정인데 이한승 대표는 시중의 염려를 잠재우고 11년째 35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리며 실험극장의 살림을 도맡고 있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1~2년 하다가 그만 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에서도 한 3~4년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했는데 벌써 11년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못할 일입니다. 10편을 공연하면 9편은 적자입니다. 그저 본전하면 잘하는 것인데 소극장 공연은 3~4천만 원, 대극장은 1억 근처입니다. 그것도 아끼고 아낀 제작비가 그런데 관객이 많을 때는 50~60%, 안 될 때는 20~30%입니다. 부족한 자금은 지원을 받기도 하고 협찬을 받기도 하지만 30% 이상은 떠맡고 갑니다. 작품을 많이 할수록 빚이 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안 하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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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미친 짓

공연을 하면 대표가 총체적으로 책임을 진다고 한다. 다른 극단도 마찬가지다. 이한승 대표는 연극계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황야에 터를 닦고 집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집은 바람 한번 불면 다 허물어집니다. 무너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또 황야에 집을 짓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창작의 아픔과 산고라고 하며 넘어가기에는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인들은 왜 연극에 몸을 바치는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절대로 못할 일이 연극이다.

“무대에 대한 외경심이랄까요? 광대라기보다는 저는 연극인들을 창조하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남의 인생을 보여주면서 영혼의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것, 혼신의 힘으로 연기를 하면서 관객과 본인 스스로에게 인생을 느끼게 해주는 것, 어찌 보면 미친 사람이 하는 것이지요.”

답을 듣다 보니까 뭔가 질문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산에 오르는 사람에게 산에 왜 오르느냐 묻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질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좋아하는 것이 먼저고 그 까닭은 나중에 알게 되는 것이 아닌가.

매년 대학로에 젊은 배우들이 수백 명 배출되지만 그중에서 살아남는 이들은 10%도 안 된다고 한다. 정말로 연극에 대한 간절함이 있는 사람이라야만 남을 것이고 그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는 만들어진다. 무대가 좋아서 연극을 하는 사람들, 그것은 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실험극장 50년 동안 수많은 작품과 연출가, 배우들이 거쳐갔다. 관객 1만 명 돌파의 장기 공연을 기록한 <에쿠우스>는 최초의 예매제도를 실시했으며 소극장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그 밖에도 <맹진사댁 경사> <허생전> <사람의 아들> <신의 아그네스> <휘가로의 결혼> <아일랜드>

<고곤의 선물> <다우트> <심판> <이오카스테> 같은 것들이 대표작이다.

배우나 스태프는 부지기수다. 이순재, 김동훈, 윤석화, 강태기, 김의경, 이낙훈, 오현경, 이정길, 서인석, 송승환, 윤소정, 박정자, 최민식 등 기라성 같은 배우를 배출했다.

작가도 이재현, 이강백, 오영진, 이근삼, 위기훈 등이 실험극장을 통해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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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극장’이 꿈

시대가 달라지면서 연극계의 풍토도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60년대는 시골 풍경같이 순박하고 연극도 그랬다. 배우들이 돈 내놓으라는 말도 없고 음악, 소품, 세트 등을 자급자족식으로 해냈다. 거기에 비하면 지금은 돈과 전문성의 일직선상에 있다. 전에는 순수하고 맑은 시대였다면 지금은 능률적이지만 계산적이 되었다. 이한승 대표도 출연료를 제대로 받은 것이 명동에서 <에쿠우스> 공연하면서 처음으로 출연료라는 것을 받아봤다고 한다.

이한승 대표의 꿈은 전용극장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빚은 쌓였지만 그는 대학로에서 가장 일찍 출근해 가장 오래 사무실을 지키는 연극인이다.

“전용극장은 제게 숙원 같은 것입니다. 전용극장이 있으면 장기적인 레퍼토리를 가지고 운영할 수 있고 인재를 키워갈 수 있으며 다양한 시스템을 가지고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소극장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250석 정도 되는 극장에서 경영과 제작이 맞물려 잘 굴러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려면 30억에서 50억은 있어야 한다고 한다. 돈 있는 사람이 연극계를 사랑하는 마인드를 가지고 투자할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까 문득 연말연시를 기해서 사재를 털어 대학이나 불우한 이웃에게 기부하는 독지가가 많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실험극장이 전용극장을 갖는 것도 아주 멋진 일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글_ 김창일 기획위원·사진제공_ 실험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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