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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 지리산 상고대의 비경] 산불 잡은 지리산 첫눈, 영험도 해라!

[첫눈 | 지리산 상고대의 비경] 산불 잡은 지리산 첫눈, 영험도 해라!

입력 2011-01-30 00:00
업데이트 2011-01-30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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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9월 지리산 함양 쪽 1,100m 고지에 난 산불이 11월 10일 새벽에 내린 눈에 진화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지리산 노고단에 올라 상고대의 절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산불도 끄고, 비경도 보여주는 지리산 태곳적 아름다움을 혼자 보기 아까워 《삶과꿈》 독자 여러분에게 글을 보냅니다.

40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지리산 섬진강변 농가에 보금자리를 튼 지 4개월째다. 행여 견딜 만하지 못해서 늦깎이로 지리산 행려 생활에 접어들었을까? 내가 굳이 지리산으로 오게 된 사연을 대라면 지리산 시인의 시 한 구절로 대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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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중에서,

나는 “행여 견딜 만하지 못해서” 지리산 언저리 빈집을 찾아 그냥 온 것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지리산 자락에 살면서 바라본 지리산은 아침저녁으로 변하면서도 시인의 노래처럼 언제나 첫 마음 그대로 변하지 않았다. 지리산은 깊고 단단한 땅이다. 태극마크 그리며 섬섬옥수 섬진강이 휘돌아쳐 흐르는 곳, 지리산!

지리산에 첫눈이 내렸다. 그 눈은 지리산 함양 쪽 해발 1100m 능선에서 난 원인 모를 산불을 진화시켰다. 헬기와 119대원 몇 백 명이 출동해도 끄지 못한 불을 자연이 내린 눈으로 간단히 꺼버린 것이다. 산불도 간단히 잡아버린 지리산의 첫눈, 영험도 해라! 지리산은 그런 산이다. 자연의 신이 불길을 잡는 산!

고단 봉우리에는 백설이 눈부시게 드리워져 있었다. 산허리까지는 오색 단풍이 불타고 있는데, 산봉우리는 신비로운 백설로 덮여 있다. 나는 지리산에 오르고 싶어 좀이 쑤셨다. 그 길로 곧 바로 지리산 성삼재로 차를 몰았다. 창문을 여니 낙엽 냄새가 가슴을 파고든다.

단풍으로 붉게 타오르는 상선암 중턱을 지나 시암재에 가까이 다가서니 하얀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금년 들어 보는 첫눈이다. 국립공원 직원들이 제설작업을 하며 염화칼슘을 뿌리고 있다. 아침 일찍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들이 고맙기 그지없다. 조심하자! 기어를 1단에 넣고 자동차를 천천히 몰며 어느 왕이 성이 다른 세 명의 장수를 파견해 지키게 했다는 성삼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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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차를 대고 차 밖으로 나오니 북풍이 세차게 몰아친다. 노고단 정상에는 푸른 하늘 아래 한 조각 먹구름이 할머니의 모습으로 누워 있다. 노고단을 향하여 합장을 하고 등산화 끈을 조여 맸다. ‘산을 존경하고 자연을 소중히 가꾸어 나가야 한다. 자연을 훼손하고 산을 무시하면 화를 입게 마련이다. 더구나 노고단(老姑檀)은 지리산의 신령인 산신할머니(노고-老姑)’를 ‘모신 곳(단-檀)이 아닌가!’

고개를 드니 노고단 산신할머니 구름은 어디론가 간데없고 시커먼 먹구름이 덮여 있다. 파란 하늘은 사라지고 금세 구름바다가 출렁거리고 있다. 금방 눈발이라도 내릴 기세다. “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했던가? 산을 찾는 사람이 무슨 얼어 죽을 흑심을 품겠는가? 노고단은 이미 눈바다를 이루고 있다.

노고단으로 가는 해발 1255m 삼거리에서 ‘무넹기’ 고개로 방향을 틀었다. 무넹기 고개는 1930년 전북으로 내려가는 물줄기 일부를 화엄사 계곡으로 돌려 물이 부족한 구례 일원에 풍년 농사를 짓게 한 곳이다. ‘물을 넘긴다’는 뜻에서 ‘무넹기’라고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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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길 옆에 선 나무들이 점점 은발로 변해간다. 상고대다! 상고대는 기온이 0˚C 이하로 내려갈 때 대기 중의 수증기가 승화되어 나무나 풀에 붙은 나무서리다. 아마 눈비가 오다가 기온이 내려가자 상고대가 되어 버린 모양이다. 무넹기 고개에서 내려다보이는 화엄사 계곡은 여전히 붉은 단풍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 멀리 섬진강이 ‘S’자로 아득하게 보인다.

다시 노고단을 향하여 길을 간다. 이제 노고단은 성난 구름바다에 휘말려 앞이 컴컴하다. 바람의 신이 성이 난 모양이다. 바람 때문에 앞으로 한 발도 나갈 수가 없다. 참다못해 고개를 돌려 종석대(1356m)를 바라보니 봉우리는 구름에 덮여 있고, 능선은 노인의 은발처럼 희끗희끗 상고대가 피어 있다.

그래도 가야 한다. 기를 쓰고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기며 눈길을 걸어간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을 지리산 상고대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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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너무 아름다워요! 여길 오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남편과 함께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 위해 왔다가 우연히 노고단에 오른 40대 중년 여인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상고대를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바쁘게 살다보니 18년 만에 지리산을 찾게 되었는데 너무나 잘 온 것 같다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지금 노고단을 오르는 길에 펼쳐진 신비한 상고대의 아름다움은 직접 보지 않고서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다. 그동안 태백산, 설악산 등의 상고대를 많이 보아 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지리산처럼 아름다운 상고대는 내 일생에 처음 본다. 무넹기에서 노고단대피소에 이르는 탐방로에는 나뭇가지에 붙은 상고대가 나무의 모양에 따라 천의 형태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대피소로 이어지는 돌층계 탐방로를 조심스럽게 올라간다. 탐방로 옆 조릿대 푸른 잎사귀에도 눈이 마치 펭귄 모양처럼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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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대피소에 도착하니 처마에 고드름이 귀엽게 달려 있다. 입구에는 노고단 산신할머니가 넉넉하면서도 매서운 눈초리로 탐방객을 쏘아보고 있다. 대피소에서 노고단 정상으로 이어지는 상고대의 은빛 파노라마는 과히 장관이다. 수없이 많은 잔가지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설화가 만발해 있다. 그 설화 중간 중간에는 푸른 주목이 파수병처럼 고개를 내밀고 있다.

휴게소에는 부지런한 등산객들이 벌써 라면을 끓여 먹고 있다. 뜨거운 커피 한 잔으로 몸을 녹이고 다시 노고단을 향해 걷는다. 하늘을 쳐다보니 푸른 하늘에 순록의 뿔 같은 설화가 기가 막히게 피어 있다. 소나무와 주목나무 잎사귀에 핀 설화도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낙엽송에 내려앉은 설화가 푸른 하늘에 하늘거린다. 상고대는 눈이 녹기 전에는 그대로 있다. 저렇게 차가운 눈으로 온몸을 포박당한 나무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을 보면 그저 경이롭기만 하다.

노고단(1440m) 고개에 오르니 피라미드형의 돌탑과 사람 두상 모습을 한 바위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돌탑의 북쪽에는 상고대가 모자이크 모양으로 붙어 있고, 남쪽에는 눈이 다 녹고 없다. 해의 방향에 따라 사물의 모습이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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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바다 속 하얀 산호 같은 비경

“마치 깊은 바다 속의 하얀 산호처럼 보여요!”

20대로 보이는 두 아가씨가 상고대의 모습에 감탄을 하며 하는 말이다. 키 작은 철쭉 가지에 붙어 있는 설화는 싸리버섯이나 바다 속의 하얀 산호처럼 보인다. 푸른 하늘에 뻗어 있는 설화는 심해 바다 속의 하얀 산호 그대로다.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불어 종주를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 노고단 정상에 단 5분을 서 있기가 힘들어요.”

지리산 종주를 하겠다고 기염을 토하던 중년남자가 머리를 흔들며 내려간다. 노고단에 이르는 계단을 오르는데 바람이 너무 세차 숨을 쉴 수가 없다. 겨우 750m의 거리가 7500m처럼 느껴진다.

노고단 정상에 이르는 마지막 계단에는 설화가 누룽지처럼 닥지닥지 붙어 있다. 정상에 설치된 돌탑에도 상고대가 붙어 있어 거대한 눈꽃을 이루고 있다. 돌탑의 모양이 마치 지리산을 산신령처럼 보이게 한다.

드디어 노고단 정상(1507m)이다! 바람이 어찌 강하게 불던지 몸을 날려 버릴 것만 같다. 숨이 차서 버티컬 리미트(수직한계)를 느낀다. 힘들지만 걸어서 여기까지 왔기에 그 감동은 더 크다. 노고단 보호대에는 상고대가 강한 바람에 쐐기처럼 얼어붙어 있다. 안내표시판도 예외 없이 상고대가 크리스마스 데커레이션처럼 붙어 있다. 아름답다!

지리산은 태곳적 아름다움을 고이 보전해야 한다!

KBS 송신탑도 하얗다. 상고대가 송신탑에 얼어붙은 것이다. 오늘따라 송신탑도 아름답게만 보인다. 통신의 편익을 위하여 불가피하게 설치되었지만 노고단에 오를 때마다 눈에 가시처럼 보였던 철탑이다.

이 아름다운 노고단에 케이블카가 설치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태곳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백색의 정상에 쇠말뚝을 박아 기계소리 요란한 케이블카를 설치하겠다는 뉴스를 상기하니 갑자기 등골에 소름이 끼친다.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겠다는 생각은 히말라야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겠다는 오만한 발상과 같은 것이다. 한번 훼손된 자연은 돌이킬 수 없는 환경 파괴를 초래한다. 우리는 세계에서 최초로 국립공원을 지정한 미국 국립공원청의 ‘미션’을 곰곰이 새겨 볼 필요가 있다.

“국립공원국은 현 세대 및 미래세대가 즐기고, 배우며,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손상되지 않은 자연적 문화적 자원과, 국립공원 시스템의 가치를 ‘보존’한다.”

지리산은 현 세대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현 세대에 이어서 미래세대가 즐기고, 배우며, 영감을 얻어가는 영원의 산이다. 우리는 이토록 소중한 자연유산을 손상시키지 않고, 보존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미래세대에게 넘겨주어야 한다(2010.11. 10 지리산 노고단에서).

글·사진_ 최오균 오지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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