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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 홍신자·베르너 삿세, 황혼 결혼식이 준 노년의 희망

이사람 | 홍신자·베르너 삿세, 황혼 결혼식이 준 노년의 희망

입력 2011-01-02 00:00
업데이트 2011-01-0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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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신자 시집 가는 날

원초적인 대자연에서 ‘세기의 결혼식’

둥근 못, 물 위로 흰색(소색) 한복의 신부가 사뿐 걸어 나온다. 동편 물가의 신랑, 물의 꽃대궐을 건너간다. 성큼, 신부를 맞이하러 간다. 이윽고 신랑 신부가 만난다. 물의 한가운데서. 신랑은 신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빙 둘러선 하객들에게 인사한다. 남과 여의 만남이, 하늘과 땅의 만남이, 남과 북의 만남이, 동과 서의 만남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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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아니었다면, 여기가 아니었으리!
그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아니었다면, 여기가 아니었으리!
“우와~” 하늘연못을 빙 둘러쳐 숨죽이고 보던 하객들은 뜨거운 격려와 갈채를 보냈다. 이 결혼식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신부는 구도의 춤꾼이자 세계적인 현대무용가 홍신자(70). 신랑도 알 만한 이는 다 아는 독일 출신 한국학자 베르너 삿세(69). 결혼식 타이틀, ‘홍신자 시집 가는 날.’

이미 하늘연못은 꽃물결이다. 어여쁜 꽃뿌리개 무용수 둘이 소국 쑥부쟁이 으아리를 춤추듯 흩뿌렸으니. 둥근 바농오름을 배경으로 청아한 하늘이 물에 폭 잠긴 듯한 하늘연못. 제주돌문화공원의 절정이다. 하늘연못은 흡사 이들 신랑 신부를 위해 오래 기다려왔다는 듯 기꺼이 그들에게 물길을 허했다.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이 지은 소색 한복은 이 대자연과 썩 조화로웠다.

2010년 한글날 오후 3시, 정신문화원 송순현 대표 사회로 아름다운 결혼식의 퍼포먼스가 시작됐다. 이 ‘세기의 결혼식’을 보러 해외에서, 전국에서 지인들과 언론사 기자 들이 모여들었다. 하객들은 연꽃차를 나누며, 초추의 양광 아래 펼쳐지는 황혼의 사랑을 축복했다.

혼례의 둥근 언약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황혼이 오려면 조금만 더 기다려라. 아직 때가 아니니. 나이는 황혼이지만 누가 황혼이라 했던가.

전날까지 날은 흐리고 비를 뿌렸다. 근데 웬일. 기적처럼 햇살이 쏟아졌다. 햇살은 빈틈없이 물 위를 비추고, 깨끗한 빛의 여세가 물 위를 따사롭게 비춰주었다. 이 철없는 신랑 신부의 결혼식을 축하하러 먼 하늘길을 날아온 이들도 많았다. 그들의 인연의 다리를 놓은 재독 화가 노은님, 조셉 보이스를 일생 찍어온 독일에서 온 사진작가 베르나르 크루거, 교토의 고려 미술관장, 한일 번역가 유동자, 파리의 윤애영, 캐나다의 송미경, 크리스탈 킴, 오슬로 대학교수 등등. 쇳대박물관 최홍규 관장, 신갑순 삶과꿈 발행인,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디자이너 진태옥, 무용가 남정호도 참석했다.

‘월인천강지곡’을 독일어로 처음 번역한 한국학자답게 신랑이 선택한 결혼식은 10월 9일 한글날. 하객들도 미리 준 악보에 맞춰 ‘한글날 노래’로 문을 열었다. 혼례의 하이라이트는 5시 30분부터 거행된 1930년대 평양식 전통 혼례. 공개적으로는 최초인 이 혼례의 총괄은 소리 좋고, 입담 좋은 서도소리 명창 박정옥(국악예술원 가례헌 대표)이 맡았다. 박 명창이 일단 축하곡 한 곡을 뽑아낸다. 내로라하는 춤꾼들도 왔으니 춤이 없을까! 홍서림의 태평무가 초록풀 위에서 나붓나붓 하늘거렸고, 춤꾼 남정호가 현대무용으로 즉석에서 이들을 축하해줬다. 예식과 공연이 어우러진 그야말로 들썩이는 축제의 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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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에 조바위 쓴 신부의 얼굴이 수줍다
원삼에 조바위 쓴 신부의 얼굴이 수줍다
“신라앙~ 출!” 소리에 사모관대 체격 큰 신랑이 현대판 젊은 기수가 이끄는 덩치 큰 말에 올라 꺼떡꺼떡 등장. 조랑말이 없어 급조한 말. 얼굴은 벙실벙실이다. 영화 촬영장이 따로 없겠다. 가마 위, 원삼에 조바위 쓴 신부의 얼굴이 수줍다. 이 의상? 평양식 의상, 20~30년대 박정옥이 갖고 있던 혼례복이란다. 그녀가 처음 입었다. 신랑 신부를 업고 한 바퀴 빙 돈다. 때마침 제주돌문화공원을 찾은 방문객들은 운이 좋았다. 함께 이 아름다운 가례를 지켜보며 박수를 보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한쪽에선 하객들을 위한 연꽃차 나눔. 먼 곳까지 오신 하객들이여, 마음껏 즐기시라. 세심한 배려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거리가 빠질까. 빙떡, 돼지고기, 잔치국수… 푸짐하다. 잔디광장에 그제야 서서히 황혼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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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연못은 완전한 사랑과 조화를 상징하는 신성한 장소다
하늘연못은 완전한 사랑과 조화를 상징하는 신성한 장소다
늙는다는 건 낡아빠지는 게 아니라 정화되는 것

“원초적인 자연으로 돌아가 보자는 것이었죠. 우리는 물에서 태어났으니까. 하늘연못은 원초적인 공간이잖아요. 여러 곳을 둘러봤고, 연못이 의미가 있겠다 싶어 택했죠. 신성한 만남은 아무데서나 나올 수 없는 거잖아요. 하늘연못은 신성하고 영적인 장소여요. 이왕 결혼하는 거니까 그냥 한 거죠. 사람들이 이런 결혼은 난생 처음 봤대요….” 홍신자답다. 신랑 삿세. “큰 말에 타서 무서웠지만 재미있었어요. 좋았어요.”

하늘연못은 제주 설화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이 등장하는 공간. 완전한 사랑과 조화를 상징하는 신성한 곳이다. 비워내고 채워도 끝없는 제주 창조의 여신 설문대할망의 헌신과 이해, 순환과 사랑을 담는다. 지난 9월, 이곳 오백장군 갤러리와 공연장 개막 공연으로 홍신자는 이 설화를 주제로 그 작은 무대에 섰다. 아무런 조건 없이. 일 년 전, 백운철 원장과의 약속이었다. 결국, 물 위가 아니었다면, 연못이 아니었다면 여기가 아니었으리.

스물일곱에 춤으로 들어갔다. 근육도 뻣뻣해졌다는 서른 넘어 데뷔했고, 서른여섯에 인도로 구도의 길 떠난 여자. 나이 마흔 넘어 열두 살 연하 화가와 결혼도 해봤다. 파격의 생. 그녀는 여전히 열정적이다. 자유다. 그 젊음의 비결은 뭔가?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것이 보인다. 젊음의 싱싱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연륜의 무게와 아름다움이. 그래서 늘 ‘지금’이 좋다는 홍신자.

이번에도 그녀는 상투적인 우리의 관습을 보기 좋게 깨버렸다. 이런 결혼식? 그냥 좋아서 했는데 사람들에게 희망이 된다 하니까 그냥 좋다는 홍신자. “우와~우리가 뭔가 했네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나는 뭔가 당당하고, 당연하고, 내추럴하게 한 건데 아이고! 좋은 일 한 것 같아. 이 세대는 연애도 제대로 못한 세대잖아요. 지금은 노년, 육십대 이혼이 많잖아요. 앞으론 황혼 이혼이 계속 쏟아질거라. 근데 이혼하지만 새 출발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는 거지. 이것이 인생의 마지막, 끝난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희망의 한 가닥을 안고 시작일 수 있다는 거죠. 인생은 항상 희망이 있어야 하는 거거든.”

둘 다 재혼. 황혼에 만나서 짧게 산다 해도 소중한 인생의 의미라는 홍신자. 어떤 사람들은 내세에 태어나서 저렇게 살겠다 하지만 내세는 모른다. 우리가 태어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내세에 미루는 건 도피야. 나도 할 수 있다. 미루지 말고 실행해야 해. 겉에서는 번드르르해 보여도 아니잖아요. 실제로는 같은 지붕 아래서 따로 살기도 해요. 늙는다는 건 낡아빠지는 게 아니라 ‘퓨리파이’(정화)되는 거예요. 인생을 한 바퀴 살다보니까 ‘러브 이즈 플레이’라고 생각해요.”

무대 위의 구도자, 열정으로 몰입하다 뒤돌아본 그녀. 이제 칠순. 이제야 꽃시절 맞는 그녀가 말한다. 사랑이 떠났다고, 혹은 노년인 그대, 노년에 이를 그대들에게.

“모두 다 하루하루 희망을 가집시다. 뒤돌아보지 말고 앞을 보며 하루를 삽시다. 평균수명도 길어지죠. 희망을 갖고 살면 지금껏 살아온 것은 고통도 경험이었음을 알게 돼요. 몸으로 고생을 많이 해도 정신적인 행복이 있을 수 있어요. 어떤 환경에, 어떤 역경에 있어도 해결해 나가면서 정신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거예요.”

그들은 제주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시내를 벗어난 곳이다. 바닷가 마을 한림의 한 작은 빌라. 그들은 거기에도 집안에 물을 끌어들였다. 데크를 설치하는 등 리모델링했다. 물 위에 살고 싶다는 꿈을 실현한 셈. “바닷물이 들어왔다 갔다 가능한 곳이에요. 1층이어서.” 1~2년 살면서 정주할 곳을 찾을 생각이란다.

제주도에선 일주일만 눌러 있으면 가기 싫어진다는 그들.

“서울은 콘크리트 아파트만 봐도 막히고, 사람 스트레스를 받는데 여기는 공기가 좋아서 다 공원 같잖아요. 공원 안에 사람들이 사는 것 같고 신성한 분위기예요. 서울 같은, 보기만 해도 물질의 세계인 곳을 피해서 여기로 온 거예요.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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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신랑 새신부의 수줍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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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삿세·홍신자 부부의 행복한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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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철부지, 열일곱 살도 너무 많다

노년의 사랑? 노년의 사랑이 젊을 때와 다른 게 있다면 바로 이런 거란다. “젊어서 한바탕 살았잖아. 이제는 그래 좋다, 서로서로 웬만하면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커지고, 그러잖아요. 서로가 노는 게 닮았어요. 어디 가자 하면 그래 좋다 가자. 7~8세 애들처럼. 열일곱 살도 너무 많아!” 경쾌하게 웃는다.

황혼의 사랑은 은근한 걸까. 아니면 정열적인가. 그저 따뜻해 보였다. 가령, 같은 곳을 응시하는 시선이 아닐까?

에스프레소 커피와 된장국을 즐기는 삿세. 유머가 넘친다. 그에게 물었다. 어디가 좋으냐고? “무슨 생선을 좋아하느냐? 좋으니까 좋아한다고 답하죠? 마찬가지죠.”답은 거기에 있다. 그와 같은 것이다. 그냥 홍신자가 좋다.

그냥 서로 편해서 좋았다. “옆에 있어도 신경 안 써도 되고, 내가 어딨다는 것만 알면. 서로 편안해요. 젊어서 연애할 땐 접시가 뒤집어지는 기분도 있지만 지금은 물 흐르는 기분. 잔잔하게 물 흐르고 있는 모습과 우리의 관계가 같다고 보면 돼요.”

‘나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순간을 춤추듯 살았다.’ 《자유를 위한 변명》의 그녀. 결혼은 부자유한 건 아닌가? 결혼은 자유이고 속박이 아니니까 더 자유의 문으로 가는 거란다. “앞으로 무용은 어떻게 되는 건가?” 그녀의 함축된 한마디. “예술은 진행하는 거지.”

“황혼인데, 다시 시작하는 것이 두렵다.”는 말은 다 위선이라는 그녀. 자유로운데 무슨 두려움이 있는가 한다. “일생 내가 하고 싶은 것, 왜 그런 것을 하냐 하는 시선과 물의가 있어도 난 너무 떳떳하고, 너무 자유롭고, 내가 하고 싶은 것 한다고 자유로웠지. 이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너무 내추럴한 거야.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거야.”

인생도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아 떠나는, 하나의 길을 찾는 순례의 과정이라면, 그에겐 결혼도 하나의 순례의 길이리라. 잘가라, 내 청춘! 어서 와라, 내 노년!

글·사진_ 허영선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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