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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바람따라 맛따라 | 화진포] 길은 맛있다 눈맛이 즐겁다

[길따라 바람따라 맛따라 | 화진포] 길은 맛있다 눈맛이 즐겁다

입력 2010-09-12 00:00
업데이트 2010-09-12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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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맛있다. 맛이 있기에 길은 즐겁다. 길 끝에는 언제나 숨겨진 맛이 있다. 짠 길도 있고, 매운 길도 있고, 달콤한 길도 있다. 길 위에서 느끼는 맛 때문에 우리는 웃는다. 눈물도 흘린다. 방황하기도 한다. 길은, 저마다 고유한 맛을 갖고 있다. 그것이 길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이다. 길은 풍경이기도 하고 역사이기도 하며 희망이기도 하다. 그걸 알려면 먼저 끌림이 필요하다. 호기심도 필요하다. 혀끝에서 맴도는 감동은 쉽게 오지 않는다. 아무리 위대한 절경이라도 끌림이 없이는 발길이 끌리지 않는다. 끌림은 더디다. 느리게 온다. 끌림만 있다면 세상 모든 길은 다 맛있다. 그것이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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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이 있는 길, 화진포 가는 길은 멀어서 맛있다. 강과 산, 호수와 바다를 모두 맛볼 수 있는 환상의 길이다. 달콤한 길이라고 해도 좋다. 맛도 없는 고속도로는 애초부터 탈 생각을 마시라. 정체도 정체려니와 단조로움을 벗어나 여운이 남는 여행을 하고 싶다면 끌림이 있는 길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46번 국도 폭염을 뚫고 양수리 지나는데 무언가 자꾸 발길을 잡아끈다. 시원한 동치미 국수가 입맛을 다신다. 이른바 ‘죽여주는 동치미 국수’. 생각만 해도 온몸이 다 서늘해지는 기분이다. 북한강을 옆구리에 끼고 도는데 멀리 모터보트가 보인다. 물살을 가르며 물 위를 떠가는 버들잎 같다. 물은 아직 퍼렇게 살아 있다. 저 푸르름에 누워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한 잎의 여자, 한 잎의 사랑… 여름은 역시 물 위의 날들이 있어 행복하다.

물 맑은 양평을 지나면서 길은 한적하다. 도로는 뜨겁게 달궈져 있지만 창문을 열면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단지 도시의 경계를 하나 넘었을 뿐인데 바람의 맛이 다르다. 몸속의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열고 바람을 마신다. 살아 있는 즐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도시라는 감옥에선 도저히 느낄 수 없는 포만감에 몸을 맡긴다. 적당히 긴장의 끈을 풀어도 좋으리라. 마음에 여유가 있다면 천년 은행나무로 유명한 용문사에 들려보는 것도 좋겠다. 마의태자가 꽂은 지팡이에서 싹이 자라 오늘날까지도 울울창창. 그 그늘에 앉아 잠시 사색에 잠겨보다가 나무젓가락이라도 하나 꽂아보는 것도 좋겠다. 느림의 철학이라고 해도 좋은 여유… 생각해보니 끌림과 느림은 여유를 전제로 한다. 마음아, 누구를 위해 울어줄까. 저 은행나무를 위하여? 아니면 도시에 남겨진 슬픈 눈망울의 소녀를 위하여? 누구면 어떤가. 끌림이 있는 것이라면 모두가 다 아름다운 것을.

6번 국도 홍천강을 따라 옥수수밭이 길게 펼쳐져 있다. 수숫대들의 몸 부딪는 소리가 차창을 때린다. ‘쉬쉬쉬’. 저건 그리움의 속삭임이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보내는 몸부림이다. 언젠가 나는 옥수수밭 근처 원두막에 앉아 <고라니>라는 시 한 편을 쓴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얼마나 사랑과 그리움에 목말라했던가. 잠시 그 시를 읊조려본다.

마음이 술렁거리는 밤이었다

수수깡이 울고 있었다

문득, 몹쓸 짓처럼 사람이 그리워졌다

모가지 길게 빼고

설레발로 산을 내려간다

도처에 깔린 달빛 망사를 피해

오감만으로 지뢰밭 지난다

내 몸이지만 내 몸이 아닌 네 개의 발이여

방심하지 마라

눈 앞에 있는 올가미가

눈밖에 있는 올가미를 깨운다

먼 하늘 위에서 숨통을 조여 오는

그믐달 눈꼴

언제나 몸에 달고 살던 위험이여

누군가 분명 지척에 있다

문득 몹쓸 짓처럼 한 사람이 그리워졌다

수수깡이 울고 있었다

<고라니> 전문, 고영

길가에 파는 옥수수 하나를 입에 물고 뜯다보니 어느새 소양강을 지나고 있다. 느낌만으로도 정겨운 이름이다. 우리의 정서 속에 살아 있는 두견새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다. 그러나 소양강에 소양강 처녀는 이제 없다. 문명이, 도시가 다 잡아갔다. 순정도 사라지고 없다. 거대한 댐만 남았다. 아쉬운 마음 달래도 볼 겸 큰소리로 <소양강 처녀>를 불러재낀다. 백담사 십이선녀탕에 발이라도 담글까. 백담사 만해마을에 들러 계곡에 더운 몸을 부린다. 물이 차다. 물빛이 옥빛이다. 물이 맛있다. 진부령 넘어가는 길가에 온통 자작나무 천지다. 재잘거리는 나뭇잎들. 반짝거리는 저 잎들의 말을 해독하고 싶다. 이 길은 명태가 산으로 와 황태가 된 길이다. 황태해장국과 황태찜을 떠올리며 고개를 넘는다. 동해의 푸른 파도가 산을 덮쳤나? 산이, 하늘이, 길이 온통 푸르다. 구름도 고래를 닮았다. 멀리 화진포가 시야에 들어온다.

화진포는 김일성 별장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예전엔 남한의 명사십리라 불리기도 했단다. 한국전쟁 전에는 북한의 영토였으나 휴전이 되면서 남한의 영토가 된 이곳은 김일성 일가가 별장으로 쓸 만큼 빼어난 경치가 자랑이다. 화진포해수욕장은 모래에서 쇳소리가 난다고 하여 명사(鳴沙)라고도 불린다. 울창한 금강소나무 숲과 맑은 호수, 기암괴석 등 조용하고 빼어난 주변 경관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과 이기붕 전 국무총리도 별장을 지어 사용했다. 절경 앞에서는 길도 잠시 숨을 고르는가. 길의 어깨가 많이 움츠려들었다. 육지에서 시작된 길은 석호에서 끊기고, 바다에서부터 시작된 길은 석호에서 생을 마감한다. 바다에게 석호는 길의 시작이자 끝이다. 화진포호, 송지호, 영랑호, 청초호… 이름만 들어도 아름다운 석호들이 속초까지 넓게 퍼져 있다. 동해안의 석호는 아직 살아 있다.

초도항, 아야진항, 거진항, 가진항, 천진항, 외옹치항, 동명항, 대포항… 동해안의 아름다운 항구 이름들. 맛 또한 좋다. 항구마다 맛있는 소리들로 가득하다. 아무리 예전만 못하다고 하더라도 새벽이면 항구는 붐빈다. 흥정하는 사람들과 뛰는 물고기들, 드나드는 고깃배들, 떠오르는 태양과 바람과 비린내들… 저 모든 것들도 길의 품안에서 나고 스러질 것이다. 저들도 길의 맛을 안다. 어디로 갈 것인가. 곰치국을 먹을 것인가, 문어를 먹을 것인가, 물회를 먹을 것인가. 행복한 고민에 마음은 벌써 입맛을 다신다. 길 끝에 닿기도 전에 배부터 채운다. 그래서 여행은 즐겁다.

TIP

찾아가는 길

화진포해수욕장 가는 길은

무조건 46번 국도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고속도로보다 최소 1시간 이상 절약할 수 있다.

거기다 눈과 귀와 입이 모두

즐거운 여행을 보장해 준다.

미시령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동해바다의 푸르름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가장 좋은 것은 휴가철에 흔히 볼 수 있는

바가지요금이 없다는 것이다.

인근 유명 해수욕장보다

찾는 이가 드물어

주민들 스스로 자제하는 것은 물론

더없이 친절하기까지 하다.

화진포 주변 석호를

둘러보는 것도 좋다.

글·사진_ 고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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