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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 삶과꿈 에세이] 걷기와 사랑에 빠지다

[걷기 | 삶과꿈 에세이] 걷기와 사랑에 빠지다

입력 2010-07-18 00:00
업데이트 2010-07-1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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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 위해 먹는다’든지 ‘자기 위해 잔다’라는 말은 어딘지 어색하다. ‘먹는다’와 ‘잔다’라는 동사는 그 행위의 목적이 명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걷는다’라는 행위의 목적은 어떤가? 차가 없어 걸을 수도 있고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정류장까지 걸을 수도 있고 시장을 보기 위해 걸을 수도 있고 운동을 하기 위해 걸을 수도 있다. 물론 단지 걷기 위해 걸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걷는다’라는 동사가 스스로 목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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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걷기 위해 걷는 것’은 하나의 놀음이 된다. 요즘 이 놀음이 꽤 유행하고 있다.

작년 봄, 영국 세필드에서 살고 있는 동생 집을 방문하여 보름 정도 머물렀다 온 적이 있다. 이삼백 년 된 고풍스런 집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작은 도시는 조용하고 옛 정취가 물씬 풍겼다. 패키지 여행에만 익숙한 나는 마을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남의 집 마당도 들여다보고 이웃과 인사도 하고 하는 것에 꽤 흥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주 정도면 영국의 반은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아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본전 생각도 나고 해서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다. 더욱이 노모를 동행한 여행이라 근교의 기차여행으로 마음을 접어야 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한국에 돌아오니 한 일이 년 살다 온 것처럼 영국이 친밀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패키지 여행에서 가이드가 목이 아프도록 설명해 주는 그들의 역사는 들을 때 그때뿐, 돌아오면 어디가 어디였던지 기억도 안 나기 일쑤였는데 참 신기하다 싶었다. 더욱이 유명한 유적지를 많이 답사한 것도 아니고 작은 도시를 뱅뱅 돌아다녔을 뿐인데 말이다.

걷는다는 것은 당신의 얼굴을 만지는 것과 똑같은 행위라고 말하고 싶다. 만져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무엇을 걸어보면 안다. 걷는다는 것은 당신과 노는 것이다. 당신은 길 속에 늘 새로운 모습으로 존재하므로 당신과 노는 것 또한 늘 새롭다.

내가 ‘걷기’라는 놀음에 푹 빠진 것은 해운대에 이사 오고부터이다. 천성이 게을러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했는데 해운대는 나도 모르게 나를 걷게 하는 곳이다. 인도가 넓고 가로수 그늘이 풍부하고 바다가 곁에 있고 산세가 깊으나 길이 험하지 않은 장산이 있다. 밤에는 문텐로드(해운대 달맞이길 산책로)가 있어 교교한 달빛에 마음을 태우며 걸을 수가 있다. 바다에 보름달이 뜨면 달빛은 파도를 타고 얼마나 아름다운 빛의 영상을 만들어내는지 모른다. 마치 바다 속에서 불빛을 밝혀 올린 것 같아 용궁의 존재가 여기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유추하게 된다.

올봄엔 해운대 바다에서 벚꽃을 따라 달맞이고개를 넘어 송정바다까지 걸었다. 새로 시작하는 연두와 바다 빛깔이 분홍을 얼마나 아름답게 해석하는지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때 가만히 당신이 내 얼굴을 만져주었다. 그랬다. 내 얼굴을 만져주는 당신! 내친김에 이기대 맑은 물빛을 따라 걷다보니 제주도 올레길이 궁금하여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다. 7코스라는 얼굴을 만져보고 나니 제주도 올레길 전 코스를 모두 만져보고 싶어 벌써 다음 일정을 잡아두었다. 아무래도 당신과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사랑은 변하는 속성을 가졌으나 당신은 내가 두 다리만 튼튼하면 나를 영원히 아름답다 할 것이니 중년의 여인에겐 어김없는 축복이다.

글_ 김종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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