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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 산티아고 순례길]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그리고 신을 만났다

[걷기 | 산티아고 순례길]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그리고 신을 만났다

입력 2010-07-18 00:00
업데이트 2010-07-1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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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순례길 다녀온 소설가 서영은

내 안에서 문학을 내려놓고

“나는 문학을 시작할 때 내 문학이 있을 자리는, 반 고흐의 ‘다 해진 〈구두〉’, 그 낡은 구두, 제 몸을 아무리 부딪쳐도 삶이 양지로 변하지 않는, 또는 끝내 양지 쪽으로 자리를 옮길 수 없는 비통한 증거로서, 다 해진 그 구두가 있는 자리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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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작가로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너무 멀리 떠나와 있는 것을 느꼈다. 거듭되는 친척들의 사업 실패로 보증 선 두 채의 집도 삽시간에 날아가고, 겨우 마이너스 통장으로 살아가는 줄도 모르고, 밖에서 생각하는 ‘서영은’은 한국문단의 거목이었던 고 김동리 선생의 마지막 아내로서, 굴지의 잘 나가는 여성 소설가로서, 중요 문학상 심사에 빠지지 않는 영향력 있는 심사위원이라는, 여전히 똑같은, 여전히 같은 지점에 머물고 있었다.

사는 게 재미없고, 마음에 생기가 없는 나날의 연속! 문학이 단지 자기표현의 욕구이고, 세상 사람들의 인정, 명예를 얻는 것이었다면… 내 안에서 문학을 내려놓고 절대적 진리, 절대적 가치를 위해 삶을 던지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자 한 명이 걷는 데만 40여 일이 걸리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걷자고 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그때부터 내 생활 모드는 서서히 그쪽으로 전환했다. 나는 인생에서 두 번의 큰 위기를 ‘걷기’로 극복해낸 경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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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와 정신이 모두 너덜너덜한 천조각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마음과 몸이 이리저리 휘청거리고, 마음속에선 ‘그러다 너 이대로 가면 죽는다’라는 목소리까지 들리는 최악의 상태. 방법은 또다시 ‘걷기’뿐이었다. 걷기에서 돌파구를 찾아내야 했다.

나는 무조건, 아무 정보 없이,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으리라, 길 위에서 죽으리라는 각오로 유언장까지 써놓고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감행했다. 내가 준비한 것은 ‘죽을 만큼 고독해야 한다’는 절대고독과 ‘실체로서의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뿐이었다.

홀연히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2008년 가을, 그렇게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수의 제자 야곱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부 마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가는 전통 성지순례 도보길이다. 내가 택한 길은 스페인의 서쪽 마을 이룬에서 시작하여 피니스테레까지의 40일간의 긴 여정이었다! 나는 앞서 그 길을 순례한 사람들이 그려놓은 길 안내 표지인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길 곳곳에 숨어 있는 노란 화살표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생명선인 동시에 순례자들을 인도해 주는 신의 손길이다. 그 길에 노란 화살표가 없다면 그 길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아니라 그냥 길일 뿐이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은 그 노란 화살표를 따라 그 긴 길을 걸으며 온몸, 온 마음에 묻혀온 일상의, 세속의 잡다한 껍질들을 하나하나 벗겨내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옛날 야곱이 그 길을 걸으며 성령으로 가득 찬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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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사노 그 너머로 계속해서 걷고 또 걷는다
갈리사노 그 너머로 계속해서 걷고 또 걷는다
나 역시 그 길이, 그 길의 힘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휩쓸어 가기를 기다리며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깊은 숲 속에서 동행자도 잃고 길도 잃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한치 앞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공포와 두려움에 등줄기가 쭈뼛거리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무리 찾아도 노란 화살표는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폭우 속에서 길을 잃고 숲 속에 방치되는 것은 아닌지… 나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나뭇가지에 찢기고 웅덩이에 빠지며 사방을 헤매 다녔다. 그러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해 선 채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아멘”

기도와 동시에 나는 평안함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동행에 의지하지 말고 혼자 걸어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입에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래, 나의 순례는 지금부터다. 나 스스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숙제를 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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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가던 순례자 스스로 카드에 도장을 찍고 잠시 쉬어가는 무인 휴게소
길 가던 순례자 스스로 카드에 도장을 찍고 잠시 쉬어가는 무인 휴게소
성령을 보고 만지다

나는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며 그 길에서 나귀를 만났다. 아니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은 나귀를 통해서 신비스럽게 내게 다가오셨다. 그 힘은 나를 다른 차원으로 인도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동안 내가 나 자신으로 남기 위해 싸웠던 모든 에너지를 내 몸에서 하나하나 찢어내기 시작했다. 산산이 부서진 내 심장에서 방울방울 떨어져 나온 피가 내가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적시면서 그 길 위의 모든 것들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작은 들꽃들과 돌멩이 하나하나, 드높고 푸른 하늘 아래 나뭇잎을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소리, 그 길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향해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날마다 나를 찢어내면서 낮아졌다. 물처럼 낮아지고, 신의 피조물처럼 낮아졌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그 길에서, 나는 나의 고치를 찢고 또 찢었다. 그리고 그 찢어낸 자리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담기는 것을 느꼈다. 자아를 초월하는 피안의 세계! 이제부터는 하나님(진리)의 뜻이 지나가는 통로로 살리라. 산티아고는 내게 순례의 종착지가 아니다. 산티아고는 내게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는 문이자 또 다른 화살표이다. 마침내, 산티아고 가는 길 위에서 나는 성령을 보고 만지고, 위로부터 주시는 꿈을 네 번이나 받았다. 성령이 밖에서 내 고치를 찢어주셨던 것이다. 이제 내 인생에 허무는 없다. 성령의 터치 한 번에, 존재를 구성하는 원형질-감정, 생각, 의식-의 배열이 완전히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영(靈)으로 살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이 그대로 믿어진다. 성경에 쓰인 모든 말씀이 그대로 믿어진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크고 아름다운, 노란 화살표 사랑

우리에게 《먼 그대》《사다리가 놓인 창》…등으로 잊을 수 없는 소설을 선물했던 서영은 소설가. 그가 40일간의 산티아고 길에서 돌아와 또 한 번 우리에게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산티아고 순례기)라는 아름다운 책을 안겨주었다.

그 책과 함께 평창동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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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이 자기를 내려놓는 길 위의 골고다 언덕에서
순례자들이 자기를 내려놓는 길 위의 골고다 언덕에서
함께 사는 개 4마리 속에서 환하게 웃음 짓는 서영은 소설가. 인사를 나누며 그냥 마주보기만 하는 데도 온몸에서 따뜻하고 편안한 기운이 흘러나와 마음이 절로 문을 열고 나오게 만드는 힘. 분명 그는 예전의 모습과는 뭔가가 달랐다. 정말 차원이 다른 세계에 발을 디디고 있는 듯했다. 아주 맑고 생기 찬 기운 아래 예리하고 선한 충만함이 흘렀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세상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돌아온 분 같다는 느낌이 확하고 다가왔다.

그는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에서 나오는 인세도 모두 선교사업에 기부했다. 뿐만 아니라 고 김동리 선생이 남긴 유품과 문학자료도 모두 근대문학관을 만들고 싶어하는 분께 ‘유산’으로 기증했다. 그에게 남은 건 이제 아무것도 없다. 산티아고로 떠나기 전 써두었던 유서대로 실행하는 삶 - 내 안일함에 스스로 비수를 꽂고, 내 인생의 화살표를 좇는 삶에서 타인의 화살표가 되는 삶을 추구하겠다는 - 하나님의 섭리와 바로 마주치는 자리, 사랑밖에 남은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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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사랑을 다해 말한다.

“나는 소설가로서 적지 않은 소설들을 발표해 왔다. 하지만, 이 책은 이전에 내가 출간한 어떤 책하고도 같지 아니하다. 이 책에 허구적인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나는 노란 화살표를 따라 길을 걸었고, 그 화살표가 가리킨 곳에서 나를 벗어던졌다. 나의 내적 변화를 이끈 것은 기도와 하나님 말씀이었다. 그 결과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 내면적 변화를 이끈 초월적 존재를 보고 만졌기 때문에 그 기쁨을 같이 나누고 싶다.(…) 영혼의 부름을 따라 걷는 모든 이는 순례자다. 일상 속에서 자기만의 노란 화살표를 찾아 걷고 있는 세상 모든 성스러운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고. 그러면서 덧붙인다.

“자기중심적 자아를 내려놓고 초월적 존재를 만나고 나서야 진리는 사는 것이지 쓰는 게 아니었다”고.

두 시간 가량 믿음의 본질, 구원, 사랑에 대한, 한 작가의 명료하고 분명한 성찰을 들으며 무한히 크고 아름다운 축복을 온몸으로 느꼈다. 크리스천이 아닌 내 입에서도 나도 모르게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 나도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과 함께. 그리고 그가 앞으로 우리에게 안겨줄 또 다른 선물(작품)에 대한 무한한 기대와 행복한 설렘으로 가슴 벅차하며!

글_ 김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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