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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 시인이고 싶다

윤정희, 시인이고 싶다

입력 2010-07-04 00:00
업데이트 2010-07-0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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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 그의 꿈] 영화 <시> 속의 ‘미자’

계절의 여왕이 본격적인 붓질을 시작했다. 복사꽃, 배꽃이 피고 벚나무 가로수들의 꽃잎이 분분하고, 버스 엔진의 소음 너머 멀고 가까운 연둣빛 산색이 눈부시게 싱그러워 등받이에 기댄 몸이 자꾸 간지러웠다. 참 오랜만에 찾아든 설렘의 정체, 아주 오래 전에 먼빛으로 한 번 보았던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그분의 웃음이 꼭 이 봄빛을 닮았었다. 그래, 나는 지금 그분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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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그분을 영화배우 윤정희라 부른다.

내가 들어 알고 있는 영화배우 윤정희 선생은 유명하지만 유명스럽지 않은 분. 유명인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아서 행복한 분. 눈빛 반짝이는 소녀처럼 삶의 기쁨으로 가볍고 경쾌하게 날갯짓하는 이 봄의 나비를 닮은 분. 삶이 곧 웃음인 분이다.

어떻게 사세요?

“사는 게 기쁘고 행복해요.”

맑고 살가운 날씨에 가벼운 봄옷 차림의 사람들로 붐비는 주말 오후 커피숍. 비교적 조용한 자리를 찾아 윤정희 선생과 마주 앉았다. 이십여 년 전에 먼발치에서 한 번 뵈었었는데 조금도 변하지 않으신 것 같다고 하자.

“내 삶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서 그런것 같다”며 활짝 웃으신다.

하지만 세상을 그런 마음으로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자 하지만 거기에는 모종의 자기희생과 현실에 대한 긍정성이 없으면 불가능하기에 행복한 삶은 퍽 드물다.

최준(이하 최): 남편이신 피아니스트 백건우 선생님과 프랑스 파리에서 지내신다고 들었습니다.

윤정희(이하 윤): 1974년에 파리로 가서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조그만 아파트인데 1979년부터 살았으니 30년이 넘었네요.

최: 이사하실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신가요?

윤: 이사할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어요. 이웃들도 모두 오랜 친구처럼 정이 들었고, 집이 불편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어요. 남편이 주로 집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는데 이웃들이 한 번도 뭐라 말한 적이 없어요. 고마울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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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오히려 이웃 분들이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세계적인 명연주를 늘 무상으로 들으며 살 수 있는데….

윤: 그런가요?

최: 해외여행을 많이 하시지요?

윤: 집에서 일 년에 절반 정도는 지내나요? 아니, 그렇게도 못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네요. 남편 연주 스케줄을 관리하는 매니저가 따로 있지만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해외 연주 때 늘 동행하곤 하니까.

최: 그럼, 백건우 선생님 매니저가 두 분인 셈이네요.

웃음이 참 많으시다. 세월을 비껴가게 하는, 만년 소녀로 살아가게 하는 그 힘 말이다.

윤: 난 참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어느 순간 선생은 살아가는 세상에서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 행복을 찾은 모양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아니, 선생의 천성이 그렇다고 하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15년 만의 영화 <시>

최: 최근에 영화 촬영 하셨잖아요? 인터뷰 기사를 보니 15년 만이라고 하던데요.

윤: 15년 전에 출연했던 그 영화는 제 나이보다 더 나이가 많은 역할이었어요. 그런데 이번 영화는 실제 나이와 맞아요. 그래서 더 애착이 가고, 촬영하는 내내 즐거웠어요.

1957년에 데뷔해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이번 영화를 촬영하면서 처음으로 두 눈이 토끼눈처럼 빨갛게 충혈되는 경험을 했다고. 매번 그러셨겠지만 이 영화는 그만큼 심혈을 기울였다는 의미. 영화 <시>는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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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의 한 장면.
영화 <시>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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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의 한 장면.
영화 <시>의 한 장면.


최: 영화 제목이 <시>이던데요. 제목이 참 특이하고 묘한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윤: 제가 맡은 작품 속 인물의 이름이 미자인데, 우연인지 제 본명이 미자에요.

최: 단순한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시나리오 보시고 바로 출연을 결정하셨나요?

윤: 전에 이창동 감독님과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 자리에서 제의를 받았는데 정작 시나리오를 받아본 건 일 년 반 정도가 지난 후였어요. 참 마음에 드는 역할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엉뚱하면서도 순수한…. 하지만 현실 속에서 미자의 삶은 미자가 생각하는 시처럼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어요. 미자는 자신의 손자 때문에 자살한 한 여자 아이의 부모를 설득하러 가다가 시골길의 정취에 빠져 시를 쓰기 위해 매일 들고 다니던 시작노트에 메모를 하고, 그 풍경에 한껏 빠져요. 그리고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을 담아 사과를 해야 할 부모 앞에서 풍경이 아름답다는 둥 이런 곳에서 살면 참 좋겠다는 둥 엉뚱한 말만 내뱉죠. 자신이 그곳에 간 이유를 쉽게 말하지도 못하고요. 그리고 돌아서는 순간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알게 되요. 하지만 다시 돌아설 순 없었어요. 영화 속 한 장면인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에요. 그리고 그 모습은 미자라는 캐릭터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최: 앞으로도 좋은 시나리오 받으면 출연하실 생각이신가요?

윤: 그럼요. 전 배우에요. 하지만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요.

최: 어떤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신지….

윤: 이번 영화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간요. 제가 미자로부터 완전히 떠나야만 다른 새로운 인물을 온전히 소화해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최: 이번 영화 속에서도 시를 공부하셨지만 실제로도 시를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독서도 아주 많이 하신다고요.

윤: 미당 서정주 선생님의 시집 《화사집》에 실린 시들을 낭송 음반으로 낸 적이 있어요. 일전의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시의 소멸을 이야기할 때 저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장담했어요.

최: 배우가 안 되셨으면 시인이 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윤: 시 쓰는 시인보다 시 읽는 독자가 더 행복할 걸요.

가림과 구김이라는 타산적이고 세속적인 삶의 의미들은 선생에게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 그 모습에서, 말씀들에서 그대로 다 보인다.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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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한 소녀의 흔적을 따라가던 미자가 소녀가 죽은 강변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시작노트를 꺼내들고 있다.
자살한 소녀의 흔적을 따라가던 미자가 소녀가 죽은 강변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시작노트를 꺼내들고 있다.


긴 삶, 긴 여정

최: 어린 시절의 꿈도 배우였습니까?

윤: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어렸을 때 장래 희망은 외교관이었어요.

최: 그럼, 소망을 이룬 셈이네요. 백건우 선생님과 선생님, 두 분이 더없이 훌륭한 외교관이 되셨잖아요?

윤: 그런가요?

들으니, 선생의 아파트엔 인터넷이 없다. 승용차도 없다. 모니터와 바퀴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눈에 실상으로 비쳐드는, 자신의 몸으로, 발길로 경험해 가는 세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행복해 하는 삶. 그래서 더없이 아름다운.

커피숍을 나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선생은 가까이에 살고 있다는 동생에게로 막 날아오른 배추흰나비처럼 가볍게 발길을 떼어 놓았다.

“흐르는 물처럼 살고 싶어요.”

선생이 오늘 긴 여운으로 오래오래 마음에 담아 둘 화두 하나를 던져주셨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의 손길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글_ 최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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