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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원칼럼] 신상폭로, 사생활 침해인가 사회 고발인가/정인학 언론인

[객원칼럼] 신상폭로, 사생활 침해인가 사회 고발인가/정인학 언론인

입력 2010-06-15 00:00
업데이트 2010-06-15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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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쯤 전이었다. ‘세다리’ 논란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29세라는 여성이 대학시절부터 5년 동안이나 사귀어온 남자친구가 자기를 속이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 한다고 인터넷에 하소연하면서 시작됐다. 누리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29세 여성의 사정을 사방에 알리면서 남자친구의 신상을 하나하나 들춰냈다. 남자친구는 29세 여성과 결혼하려는 여성 이외에도, 직장에서 또 다른 여성을 사귀고 있다 해서 양다리가 아닌 세다리라는 별칭이 붙었다. 마침 어머니 같은 청소 아주머니에게 폭언을 했다는 ‘패륜녀’ 파문이 이어지던 터라 세다리는 새삼스레 개인의 사생활 침해가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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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학 언론인
정인학 언론인
사생활권은 1900년대 들어서 국민의 기본권으로 자리잡은 법 개념이다. 사생활권은 우선 본인이 비밀로 하려는 본인 고유의 속성을 공개당하지 않는 인격적 영역의 불가침을 말한다. 사생활권은 외형적 생활뿐만 아니라 본인에 관한 정보나 관련 내용을 본인의 의사에 따라 공개하거나 비밀로 감출 수 있는 권리도 포함하는 복합적 권리로, 우리 헌법은 17조에서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선언했다. 특히 인터넷이나 통신위성과 같은 첨단 통신기기가 상용화된 요즘 개인의 사생활권 보호는 주목해야 할 사회적 가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나 권리 못지않게 공동체의 건강성을 지키고, 그 건강성을 보강하려는 사회적 기능 또한 권장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일제의 군국주의나 나치즘에서 보듯 건강성을 잃었던 공동체는 예외 없이 인간의 존엄을 유린했고, 공동체의 건강성을 지켜내지 못했던 사회는 결국 스스로 무너졌다. 인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확장시키면서 한편으로 공동체의 건강성을 담보하려는 수단으로 고발이라는 사회적 기능을 권장하고 발전시켜 왔다. 가진 자의 횡포를 세상에 알려 함께 비판하고, 누린 자의 가식을 세상에 알려 함께 질타하려는 자발적인 고발정신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의무이자 미덕이다. 공동체 구성원의 의식이 절제되고 성숙되었다면, 비록 고발방식이 개인의 영역과 마찰을 빚더라도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할 것이다.

세다리가 알려지자 누리꾼들은 앞다투어 29세 여성의 하소연을 세상에 알렸다. 남자친구의 본명과 출신학교, 그리고 직장을 거명하고 양다리가 아니라 세다리라는 주장도 내놨다. 누리꾼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남자친구 부모의 신상과 함께 결혼식장과 시간도 세상에 알렸다. 혼란의 시간이 흐르고 29세 여성이 남자친구로부터 사과를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누리꾼들은 마치 마술에라도 걸린 듯이 순식간에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누가 누리꾼들에게 사생활을 침해했다고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누리꾼들이 없었더라도 29세 여성이 남자친구에게서 사과를 받을 수 있었을까. 거짓과 위선, 특권과 편법을 서슴지 않는 우리의 뒤틀린 양다리 행태를 어떻게 이보다 더 웅변적으로 질책할 수 있었겠는가. 무차별이라고 단정하는 누리꾼들의 폭로가 아니었다면 청소 아주머니가 어떻게 사과를 받아낼 수 있었겠는가.

‘스폰서 검사’의 내막이 들춰지자 검찰은 실정법 위반자의 주장이라고 목청을 높였지만 검찰은 바로 그 실정법 위반자의 지적을 받고서야 바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군 당국은 천안함과 관련된 의혹 제기를 날조라고 공언했지만 감사원 감사결과가 발표되면서 이것저것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교육계의 돈봉투 관행도 근절되어야 한다. 집단이기주의적 행태도 바로 잡혀야 한다. 고질화된 공기업의 방만한 경영 폐습도 치유되어야 한다. 음해와 중상을 서슴지 않는 간사한 행태도 심판받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안타깝게도 사회적 고발을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어둠을 고발하는 용기를 먼저 평가해 주어야 한다. 신상폭로가 사생활 침해가 아니라 사회 고발인 까닭이기도 하다.
2010-06-15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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