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읽기] (97) 가도의 동강진 무너지다

입력 : ㅣ 수정 : 1970-0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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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병자호란을 통해 여러 가지를 얻었다. 우선 자신들을 끝까지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조선을 굴복시킴으로써 대외적으로 ‘제국’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다른 측면의 소득도 짭짤했다. 망해가고 있던 명에게 조선은 가장 충성스러운 번국(藩國)이었다. 그런데 청이 조선마저 제압함으로써 명은 이제 고립무원의 상황이 되고 말았다. 청은 또한 조선을 끌어들여 명을 공략하는 데 활용할 수 있었다. 조선의 군사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지만, 수군과 화기수들은 만만치 않았다. 청은 조선 수군과 화기수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그 첫 결과가 가도( 島)의 함락으로 나타났다.

충북 충주시 단월동에 있는 충민공 임경업(1594~1646) 장군의 사당 충렬사.임경업 장군은 1637년 조·청연합군의 일원으로 가도에서 명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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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충주시 단월동에 있는 충민공 임경업(1594~1646) 장군의 사당 충렬사.임경업 장군은 1637년 조·청연합군의 일원으로 가도에서 명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명 배신 위기에 처해

전세가 기울어 청에게 항복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을 때에도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오는 것만은 피하려 했었다. 하지만 인조는 결국 출성하여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런데 항복한 이후에도 인조나 조선 조정이 끝까지 피하려 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선이 군사를 내어 청군을 원조하고, 명을 공격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1637년 2월3일, 용골대와 마부대는 창경궁으로 인조를 찾아왔다. 그들은 조선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가도 정벌에 협조하고 동참할 것을 강요했다. 당시 인조나 조정은 서슬퍼런 그들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조선은 당장 황해도의 병선 100척과 수군 3000여명을 징발했다. 징발 과정에서 민폐를 따질 겨를도 없었다. 평안병사 유림(柳琳)을 주장으로,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을 부장으로 삼아 병력을 이끌고 철산 앞바다로 진격하도록 했다.

청군의 수군 지휘관은 이신 공유덕과 경중명이었다.1633년 명에서 선단을 이끌고 귀순해온 두 사람은 청군 가운데는 드물게 바다와 해전을 아는 장수들이었다. 홍타이지의 두 사람에 대한 총애는 각별했다. 선단을 이끌고 귀순해온 것에 감격하여 공유덕 휘하의 병력을 천우병(天佑兵), 경중명 휘하의 병력을 천조병(天助兵)이라 불렀다. 두 사람을 위해 심양에 거대한 저택도 새로 지어주었다.‘천우’,‘천조’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홍타이지에게 두 사람은 ‘하늘이 청을 돕기 위해 보내준 장수들’이었다.

충렬사에 있는 임경업 장군의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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