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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42) 조선의 대표술집, 선술집과 색주가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42) 조선의 대표술집, 선술집과 색주가

입력 2008-10-27 00:00
업데이트 2008-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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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유쾌한 것이다. 아마 인류의 발명품 중 최대의 발명품을 꼽으라면, 술이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이런 술이니만큼 술에 대한 문헌은 적지 않다. 한데 여기에도 구멍은 있다. 술은 집에서도 마시지만, 대개는 술집에서 마신다. 술집은 오로지 술 마시는 데 집중하기 위한 음주의 전용공간인 것이다. 술집에 대한 문헌은 참으로 드물다. 우리가 만약 고려시대의 술집이나 조선시대의 술집에 대해 무언가 알고자 한다면, 막막함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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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선술집’ 술청 앞에서 선 채로 술을 마시게 된 선술집 풍경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 ‘선술집’ 술청 앞에서 선 채로 술을 마시게 된 선술집 풍경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그러니 신윤복의 ‘선술집’(그림1)과 같은 눈으로 술집을 보여주는 그림이야말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조선시대 술집 그림으로 단 하나 남은 것이니,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 어디 그림을 감상해 보자. 그림의 정중앙의 붉은 옷에다 노란 초립을 쓴 사내는 젓가락을 들고 무언가를 집으려 하고 있다. 이 사람은 별감이다. 별감은 전에 설명한 바 있는데, 액정서란 관청에 소속되어 궁중의 열쇠, 임금의 심부름 따위를 맡는 사람이다. 이들이 조선후기 기방의 운영자인 기부(妓夫)가 되고, 또 서울의 연예인과 유흥계를 장악한 사람이라는 것도 말한 바 있다. 별감이 술집에 나타난 것도 그들이 먹고 마시고 놀고 하는 계통을 장악한 축이기 때문이다. 별감 옆에 사내 둘이 있는데, 이들의 복색만으로는 어떤 사람인지 알 길이 없다.

그림 맨 오른쪽의 사내는 약간 별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데, 이 사람은 의금부 나장이다. 이 사내가 걸치고 있는 검은 색 옷은 까치등거리 또는 더그레라고 하고, 쓰고 있는 뾰족한 모자는 깔때기라고 한다. 더그레와 깔때기는 오직 의금부 나장만이 입는 옷이다. 의금부는 왕명을 받아 형장(刑杖)을 써서 국사범을 문초하는 권력기관이었다. 나장은 다른 관청에도 물론 있지만, 의금부가 원래 권세 있는 곳이라, 의금부 나장만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별감을 위시한 다섯 사내는 모두 술을 마시러 온 술꾼들이다. 그런데 그림 맨 왼쪽의 맨상투 차림의 총각은 술꾼이 아니다. ‘중노미’라 부르는 술집에서 일하는 젊은 남자다. 술잔을 나르거나 아궁이에 불을 때거나 하는 허드렛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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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근 ‘색주가 모양’.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소장
김준근 ‘색주가 모양’.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소장
조선 정조시대 금주령 풀리자 술집 번창

이 술집 그림에서 희한한 것은 술을 따르는 주모만 앉아 있을 뿐, 아무도 앉아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서 마시는 집을 선술집이라고 한다. 요즘 선술집이라면, 대개 부담없이 마실 수 있는 싼 술집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선술집에서는 모두 서서 마시기에 선술집인 것이다. 조선시대 문화에 대해 해박했던 김화진 선생은 ‘한국의 풍토와 인물’이란 책에서 선술집에 대해 소상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선술집에서는 백 잔을 마셔도 꼭 서서 마시고 앉지 못하였다고 한다. 만약 앉아서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술꾼들이 “점잖은 여러 손님이 서서 마시는데, 버르장머리 없이 주저앉았담. 그 발칙한 놈을 집어내라.”고 시비를 걸었고,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위 그림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다.

선술집에서는 술 한 잔을 사면 안주 하나를 끼워준다. 요사이 술집은 술과 안주를 각각 셈하지만 조선시대 선술집은 술값에 안주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해가 서산에 기울면 술꾼들은 목이 마르다. 선술집을 찾아 들면서 젓가락 통에서 젓가락을 집어 들고 너비아니·날돼지고기·삶은 돼지고기·편육 따위의 진안주를 집어 석쇠 위에 놓고 주모가 앉아 있는 목로 앞으로 와서 ‘두 잔 주어’ 하면, 주모는 술단지에서 국이(국자 비슷하게 생긴 것)로 잔수대로 떠서 양푼에 붓는다. 그리고 그 양푼을 물이 끓고 있는 솥에 넣어 찬기운을 없앤다. 냉기를 사라지게 한다고 하여 이것을 ‘거냉(去冷)’이라고 한다. 술값 계산은 술꾼이 잔을 입에서 뗄 때에 중노미가 안주접시를 목로에 놓으면서, “몇 잔 안주요.” 하고 잔 수를 계산해 준다.

이런 술집이 생긴 것은 조선조 정조 때부터다. 그 이전에도 술집이 없었던 것이 아닌데, 정조 때부터 생겼다고 하는 것은 왜인가. 정조 바로 앞의 임금인 영조는 1724년에 즉위하여 1776년까지 무려 53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올해가 2008년이니까 1956년부터 왕위에 있었다고 생각해 보라. 장구한 세월이 아닌가. 한데 반세기를 넘도록 영조가 양보 없이 지켜온 정책이 금주정책이었다. 아무도 반세기 동안 술을 마실 수 없었고, 술집은 모두 문을 닫아야했다. 이 혹독한 금주령은 정조가 왕이 되면서 비로소 풀렸고, 서울 시내에 술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것이니, 선술집 역시 정조 시대 이후 번창하게 된 것이다.

정조가 믿고 의지했던 좌의정 채제공은 이 술집의 번창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비록 수십 년 전의 일을 말하더라도, 술집의 술안주는 김치와 자반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백성의 습속이 점차 교묘해지면서, 현방(懸房)의 쇠고기나 시전(市廛)의 생선은 태반이 술안주로 소비됩니다. 맛난 안주와 국이 술단지 사이에 어지러이 널려 있으니,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젊은 사람도 안주를 탐하느라, 삼삼오오 어울려 술을 사서 마시니, 이 때문에 빚을 지고 자신을 망치는 자가 부지기수입니다. 시전의 반찬거리의 값이 날이 갈수록 뛰어오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술집에서 안주를 경쟁하듯 개발하여 내 놓는 바람에 시전에서 파는 쇠고기와 생선의 태반이 술안주가 되고, 술안주를 탐하느라 젊은이들이 빚을 지는 경우까지 있다고 하니, 정조 시대 술집의 성황을 알 만하다.

술집은 선술집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외주점이란 것도 있었다. 이 술집은 술손님이 찾아가면 주인 여자는 손님을 직접 만나지 않고, 말로 주문을 하고 술상을 내보내고 하여 주인과 손님이 내외를 하기에 ‘내외주점’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선술집보다는 조금 고급한 집이다.

색주가는 손님들에게 바가지 씌우기 일쑤

이보다 낮은 수준의 술집이 있는데, 색주가(色酒家)가 그것이다. 색주가는 여자가 나와서 노래를 하고 아양을 떨고 술을 파는 곳이다. 그림(2)는 김준근의 ‘색주가 모양’이다. 술상 앞에 짧은 갓을 쓴 남자 셋이 앉아 있고, 젊은 여자가 잔에 술을 따르고 있다. 이 그림만으로는 색주가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 그림에 ‘색주가 모양’이라는 제목이 없다면 색주가인지 아닌지 모를 것이다. 색주가의 여자는 기생이 아니다. 기생은 기방에 있는 법이고, 기방은 제일 고급 술집이었다. 기생은 가곡이나 시조를 부르지만, 색주가의 여자는 오직 잡가만 부른다. 색주가는 여자가 있다 뿐이지 안주도 술도 맛없는 곳으로 손님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기 일쑤였다고 한다.

색주가는 홍제원에 집단적으로 있었고, 뒤에 이것을 본떠 남대문 밖 잰배(紫巖)와 서울 파고다 공원 뒤와 동구안(授恩洞) 서편 뒷골목에 집단으로 있었다고 한다. 물론 잰배 등의 곳은 언제 생겼는지는 미상이다. 김화진에 의하면, 색주가는 밖에서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색주가의 문 앞에는 술을 거르는 도구인 용수에 갓모(비가 올 때 갓 위에 걸어 쓰는 모자)를 씌워 긴 나무에 꽂아 세우고, 그 옆에 자그마한 등을 달아놓는다. 낮에는 나무에 용수 씌운 것으로 표시를 한다. 집집이 긴 나무를 세운 것과 등불을 꽂아두었으니, 색주가가 있는 동네는 밤이 되면 반짝반짝 빛이 나는 독특한 분위기의 동네가 되었던 것이다. 해가 지고 거리에 등불이 하나 둘 켜지면 화장을 짙게 한 여자들이 나와서 잡가를 부르면서 지나는 행인을 붙잡는다. “이 집은 술맛도 좋고 색시도 예쁘니 한 잔 잡숫고 가시지요.” 하기도 하고, 혹 손을 끌어 잡기도 하였다. 술을 좋아하는 분들은 알리라. 이 풍경은 불과 십 수 년 전까지 서울과 부산 대구 등 대도시의 밤에도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없어져서 아쉽냐고? 아니, 그 여성들의 신산(辛酸)했을 삶을 생각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2008-10-27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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