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1) 천안 광덕~성환

입력 : ㅣ 수정 : 1970-0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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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령고개를 내려오자마자 만나는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는 주막촌이었다. 고개를 힘겹게 넘다 보니 술로 목을 축이거나 국밥으로 허기를 끄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터이다. 저녁 때 고개를 내려온 행인들은 하룻밤 머물다 떠났다.

주민 김재옥(79)씨는 “옛날에는 도로변에 주막이 꽉 찼다.”고 말했다. 그것이 50여년 전 일이라고 전했다. 마을에서 만난 박상선(87·여)씨는 “문기네, 용하네…. 마을 전체가 주막촌이었다.”고 회고했다. 마을 입구에는 ‘원터’라고 쓴 바위가 있어 옛날 마을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 주막촌 늙은 감나무 아래 구한말 ‘3일천하의 혁명가’ 김옥균의 성장지임을 알리는 비석이 외로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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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 주막촌 늙은 감나무 아래 구한말 ‘3일천하의 혁명가’ 김옥균의 성장지임을 알리는 비석이 외로이 서 있다.

김옥균이 양자 가기 전 3년간 살던 곳

주민들은 지금도 자기네 마을을 ‘주막’이라고 불렀다. 나그네들이 북적거리며 흥정망청대던 마을은 옛날의 영화가 사라지고 누추한 모습으로 있다.

좀더 걸어서 내려오면 이 마을 안쪽에 김옥균의 흔적이 있다. 논 옆에 ‘김옥균 선생 성장지’라는 비석이 서있다.1853년 이 마을로 이사와 형조참의이던 서울의 재당숙네 양자로 가기 전 3년간 살았다고 비는 전한다.

100평 정도의 땅에 울타리를 쳐놓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옥균 유허를 둘러보고 “작은 비라도 세워줘라.”고 해 1979년 비가 세워지고 울타리가 쳐졌다고 한다. 마을 이장 김용성(55)씨는 “제사는 지내는 게 없고 해마다 풀만 깎아준다.”고 말했다. 울타리 안에는 김옥균이 살 때부터 있었는지 늙은 감나무가 하나 있다. 금세라도 떨어질 듯한 수많은 감이 늦가을의 정취를 한껏 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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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500년 전통의 왕버들·장승 마을

옛길은 곡교천을 따라 달린다. 조치원과 천안으로 갈라지는 구정마을 삼거리에서 국도 1호선으로 바꿔 천안방면으로 뻗는다. 그러다 잠시 국도를 벗어나 연기군 소정면으로 빠져 들어간다.

소정리역 못미처 곡교천 옆에 왕버들군락지가 있다. 키가 20∼30m쯤 되는 왕버들 수십그루가 자라고 있다. 조선 초기에 한 선비가 낙향을 해 집성촌을 조성하면서 “마을의 꼬리가 짧다.”는 풍수에 따라 냇가에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1만 5000평에 달했으나 일제가 토지조사를 실시해 지금은 3000평 정도만 남았다. 주민 이병두(51)씨는 “400∼500년 된 왕버들은 7∼8년 전 얼어 죽었다.”며 “봄이면 사진을 찍으려는 이들이 많이 몰린다.”고 전했다.

소정역 옆으로 난 옛길을 따라 2∼3㎞쯤 가면 대곡4리 자연마을인 ‘한자골’이 나온다. 일제 때 지어진 소정역은 2년 전 화재로 전소된 뒤 다시 지어져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한자골 마을 입구에는 장승 5∼6개가 서 있다. 윤년이 오면 주민들이 정월 대보름 전날 장승을 새로 깎아 박고 제를 지낸다. 주민들은 장승이 마을의 수호신이라고 믿고 있다. 주민 류재두(72)씨는 “500년 전 마을이 조성될 때부터 이어지는 전통”이라며 “묵은 장승과 새 장승을 동아줄로 묶어 놓고 제를 지낸다.”고 말했다.

애틋한 사랑 전하는 천안삼거리

옛길은 곧바로 국도 1호선과 만나거나 결별하면서 천안시에 진입한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동조한 고려 윤사덕 장군이 왜구와 싸운 도라티(고개)를 거쳐 천안삼거리로 접어든다.

천안삼거리는 충청과 호남, 영남이 만나는 삼남의 요로다. 어사 박현수와 기생 능소의 애틋한 사랑이 전해지는 곳이다. 이 전설은 옛날 홀아비 한 사람이 ‘능소’라는 어린 딸과 어렵게 살다 변방의 수자리로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변방으로 떠나던 그는 천안삼거리에서 버드나무 지팡이를 땅에 꽂고 “이 지팡이에 잎이 필 때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며 딸을 주막에 맡겼다. 능소는 이곳에서 기생이 돼 아비를 기다리다 과거 보러 가던 전라도 선비 박현수와 인연을 맺는다.

박현수는 장원급제 후 어사가 돼 내려오다 능소와 재회한다. 이때 ‘천안삼거리 흥∼ 능소야 버들은 흥∼’하는 흥타령을 불렀다고 한다. 이 지팡이가 자라고 퍼져 이곳에 버드나무가 많다고 전해진다. 천안삼거리에서 가지를 휘휘 늘어뜨리고 있는 수양버드나무는 이래서 능소버들이나 능수버들이라고 따로 부르고 있다.

이도령이 한양을 오간 길이고 스토리도 ‘춘향전’과 비슷하다. 옛길을 따라 이런 이야기가 유행했던 모양이다.

삼거리공원은 삼거리에서 시내로 빠지지 말고 우회전, 경부고속도로 목천IC 방면으로 400m쯤 가면 나온다.

삼거리공원에 ‘하숙생´ 노래비

공원은 넓고 대형 연못도 있다. 최희준이 부른 하숙생 노래비가 연못 주변에 서있다.‘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천안 입장 출신인 고 김석야씨가 노랫말을 지었다고 해 2001년 7월 비석이 세워졌다.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1731∼83)의 시비(詩碑)도 있다. 그는 천안 수신면 장산리가 고향이다.‘다툼이 없으니 온갖 비방 면하겠소/재주스럽지 못하니 헛명예 있을소냐’ 홍대용은 자명종을 만들고 ‘지구는 돈다.’고 생각한 북학파의 선구자였다. 이 시비는 1983년 4월 건립됐다.

연못 옆에는 ‘영남루’도 있다. 영호남의 관문인 화축관(華祝館)의 문이었다. 화축관은 왕들이 온양온천으로 행차할 때 묵어가던 숙소다.1601년 선조 때 세워졌고 규모가 20여칸에 달했다. 일제 때 경찰서 숙소, 헌병대 사무실에서 해방 후에 학교 관사로 사용되다 헐리고 이 문만 남아 1959년 이곳에 옮겨졌다. 문화재자료 12호.

공원을 산책하던 김청동(67·삼룡동)씨는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옛날에는 이 주변이 모두 주막촌이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도로변의 능수버들만 천안삼거리의 내력을 일러준다.

옛길은 다시 시내 쪽으로 나와 천안시청이 있던 구도심을 지난다. 시청이 신도시로 옮기면서 구도심은 최근 누리던 영화가 갈수록 사라지고 있었다.

고려 왕건의 군사훈련장이었던 천안공대 뒤편 부대동을 지나 시름새로 접어든다. 시름새는 왕건이 후백제를 치러 가다 성거산에 오색 구름이 뜬 것을 보고 “산에 신이 있다.”고 여겨 제사를 지내줬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지금은 읍내 규모의 시가지 모습이다.

숭어와 배가 드나들던 안성천

5분쯤 더 가면 성환읍 대흥리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 사적비가 나온다. 국보 7호다. 고려 현종이 1021년 아버지 안종의 뜻을 받들어 280칸짜리 사찰을 짓고 이 비석을 세웠다. 고려 10대 사찰의 하나였지만 ‘망이·망소이난’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비만 남았다. 비문은 ‘해동공자’로 불리고 있는 고려 최충이 지었다.

고려 때 이곳은 갈대밭이 우거져 강도가 많았다고 한다. 현종이 사찰을 세운 것은 나그네를 보호하려는 뜻도 있다. 현재는 갈대밭은 거의 없고 국도변 좌우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옛길은 이어 안성천에 이른다. 그 전에 길은 국도에서 약간 동쪽으로 갈라진다. 옛길이 있던 곳은 다리는커녕 징검다리도 없다.

안성천에 붙어 있는 성환읍 안궁5리 송동수(51)씨는 “아산만방조제가 생기기 전 안성천에서는 숭어와 망둥이 등 바닷고기도 많이 잡혔다.”며 “갯벌이 뒤덮여 있었고 배도 자주 들락거렸다.”고 회고했다.

안성천교를 건너면 경기 평택·안성 땅이다. 두 지역의 경계 부근이다.

글 사진 천안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한·중·일 격전지 성환

충남 천안시 ‘성환’은 일본이나 일본인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간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벌인 전쟁의 승패에 이 일대 전투가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멀게는 백제시대 때다. 백제가 660년 멸망한 뒤 유민들이 부흥운동을 벌일 때 일본이 돕는다. 일본은 663년 이곳에서 당나라 군대와 맞붙었다.3만명의 일본군은 아산만으로 전함들을 상륙시켰다가 갯벌에 묶였다. 화공을 퍼부은 당나라에 대패했다. 바다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아산만과 이어졌던 안성천교 주변을 지금도 지역 주민들이 ‘몰왜보(沒倭洑)’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성환읍 안궁리와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 일대이다.

천안 직산위례문화연구소 백승명 소장은 “이 전투는 신라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고 밝혔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이 부근 직산에서 조선을 지원하러온 명나라군과 싸운다.1597년의 일로 역시 일본이 대패한다. 왜장 구로다가 이끌던 이 전투에서 진 일본은 부산까지 밀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철군한다.

사가들은 ‘직산전투’를 행주대첩·평양전투와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꼽는다. 일부에서는 직산전투 대신에 ‘진주대첩’을 넣기도 한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때 이곳에서 다시 맞붙는다. 청나라군과 첫 전투다. 일본은 이 전투에서 대승해 청나라군을 평양 위로 밀어내고 기선을 제압했다.‘안성천’이란 이름도 이 전투에서 지어졌다고 백 소장은 말한다.

이처럼 성환은 한국, 중국, 일본이 한반도에서 벌인 전쟁에서 승패를 결정한 중요한 격전지로 평가되고 있다.

백 소장은 “일본은 3차례 전투 가운데 최후에 자존심을 되찾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면서 “이런 자긍심 때문에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됐을 때 성환역의 역장을 다른 역장보다 한 계급 높은 간부를 앉혀 성환에 특별 대우를 했다.”고 말했다.

천안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2007-12-03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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