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한길 오늘은 딴길] (5) 이경숙 vs 이계경

입력 : ㅣ 수정 : 2005-08-30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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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까지만 해도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눈물’이었다. 갖은 전근대적 억압 아래 신음하느라 웬만한 여성이라면 ‘소설책 한 권’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여성운동가들은 ‘두 가지 적’과 싸워야 했다. 인권 등 ‘비(非)민주 영역’과 전근대적인 ‘아비 이데올로기’와 동시에 대결해야 했다.

자연스레 다른 분야의 운동보다 갑절 힘들었고 여성운동 내부의 동질감은 튼실했다.‘공동의 적’ 앞에서 어지간한 방법론상의 차이는 문제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이 여야로 갈려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을 땐 어떤 양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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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전화·여성민우회 창립

한나라당 이계경 의원은 여성운동 1세대의 마지막 인물. 이화여대 시절 눈뜬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크리스찬 아카데미를 통해 담금질한 뒤 여성운동으로 꽃피웠다. 여성운동계의 중심에 몸담으면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며 활동했다. 열린우리당 한명숙 의원이 투옥됐을 때 뒷바라지한 일이나 빈민운동가인 홍미영 의원을 도우려 인천으로 내려갔던 일 등 숱한 일화가 있다.

이 시절 이 의원의 활동에 대해 열린우리당 이경숙 의원은 “여성운동계의 귀중한 선배로 많은 선후배를 물심 양면으로 도와줬다.”고 말한다.

이경숙 의원은 크리스찬 아카데미 중간집단교육을 통해 여성문제에 눈을 떴다. 이후 83년 여성평우회 창립에 참여한 뒤 87년 여성민우회를 창립하고 방송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계경 의원은 후배 여성운동가에게 “여성단체 모임에 가보면 늘 논리적이고 정리를 잘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지난 17대 때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다. 둘다 비례대표였지만 입장은 여야로 나뉘었다.

이계경 의원의 한나라당 입당에 대해 당시 여성계 시각은 곱지만은 않았다. 이경숙 의원은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감추지 않는다. 그 이유로 “여성운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선배로서 중요한 결정을 의논도 하지 않고 결정한 점과 한나라당과 같은 보수적 집단에서 여성운동을 할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계경 의원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당에 입당할 때 여성계의 비판이 거센 데 놀랐다. 제 원칙은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해 혼자 100걸음을 앞서가기보다는 100명이 한 걸음 나가는 게 낫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계경 의원은 한나라당에서 여성문제에 관해 많은 족적을 남겼다.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개정안, 부부재산분할권 등이 그가 흘린 땀의 결정체다.

‘박근혜 패러디´등 입장차 선명

두 사람의 입장 차이는 지난해 7월 청와대 홈페이지에 ‘박근혜 대표 패러디’가 실렸을 때 선명해졌다. 이계경 의원은 “사건 발생 초기 열린우리당 여성의원들이 당 입장 때문인지 함께 싸워주지 않으려고 미적거려 곤혹스러웠다.”고 토로했다. 반면 이경숙 의원은 “여성특위에서 함께 풀려고 했는데 한나라당 의원들이 먼저 성명서를 내고 회견을 하는 바람에 힘을 합칠 기회를 놓쳤다.”고 반론을 편다.

이 사건 이후 ‘여야 공조’가 재연됐다. 두 의원도 ‘문화정책포럼’에서 함께하면서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여성의원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전히 차이를 보인다. 이경숙 의원은 “여성문제는 여성운동 독자적 시각에서 풀 수도 있지만 민주화라는 다른 시각도 겹쳐 있는데 이 점에서 이 선배가 열린 자세를 보여줬으면 한다.”며 ‘민주화’에 무게를 둔다. 이에 견줘 이계경 의원은 “여성운동 관점에서 당론을 떠나 우리 사회의 뒤처진 곳을 테메우다 보면 국민들의 공감을 얻을 것이고 그에 따라 공정한 평가가 내릴 것”이라며 ‘여성’에 악센트를 찍었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2005-08-30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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